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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보고 자빠지자

이토록 우아한 유머2 / “자네에게 그림을 보내고 나니 아스파라거스 200프랑어치가 떨어져 있지 뭔가”

에두아르 마네 ‘아스파라거스 다발’과 ‘아스파라거스’

글  이수정 아인아르스 대표·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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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미술시간에 외웠던 화가들의 이름은 무의식의 차원에까지 각인되었는지 ‘마네’하는 순간 ‘마네모네드가르누아르’가 자동으로 딸려온다.
       
가끔 강의 현장에선 마네, 모네가 한 사람인 줄 알았다는 경우도 있고 마네랑 모네랑 같은 사람 아니었냐는 질문도 나온다. 하긴 그저 이름만 알고 지내는 지인의 경우, 시간이 지나면 그가 소연이었는지 수연이었는지 헷갈릴 때도 있지 않을까?
   
하물며 좀처럼 발음하기 힘든 프랑스 사람의 이름이 마네인지 모네인지 딱 구분해 아는 일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거다. 누군가는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마네와 가난하게 자라 제대로 된 미술 교육을 받은 일이 없었던 모네를 구분하기 위해 마네는 “돈이 많네"로, 모네는 “가난해서 모내기했어"로 외웠다는 재기 발랄 노하우를 전하기도 했다.
              
오늘은 마네에 관한 이야기다. 아래의 두 작품이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마네의 그림일 것이다. 지금의 관점으로 보기엔 그다지 유별난 작품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미술사를 통틀어 가장 욕을 많이 먹은 그림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풀밭위의 점심식사’ 에두아르 마네, 1863, 208X264.5cm, 오르세미술관
  
‘올랭피아’ 에두아르 마네, 1865, 캔버스에 유채, 오르세미술관 
   
   
마네의 아버지는 법관이었다. 당연히 마네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반대했다. 그 당시에도 통했는지 모르겠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듯이 결국 마네는 쿠튀르의 아틀리에로 들어간다. 그러나 아카데믹한 역사 화가인 스승의 스타일이 맘에 들지 않아 예전 루브르미술관에서 벨라스케스와 할스를 모사(模寫)하면서 쌓은 실력으로 자신만의 자유로운 화풍을 만들어낸다. 
 
마네는 1863년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살롱전에 출품한다. 그러나 입상하지 못하고 우연히 '낙선전'에 전시되는데, 당시 나폴레옹 3세는 자신의 예술 애호를 보여주고 더불어 복잡한 사회문제에서 시민들의 눈길을 돌리기 위해 살롱전에서 탈락한 그림들을 모아 '낙선전'을 개최했다.
   
마네는 1865년 ‘올랭피아’를 출품해 간신히 살롱전에 입상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마네의 고단한 예술 세계가 시작된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풀밭 위의 점심식사와’ ‘올랭피아’를 그린 그를 조롱했고, 연일 신문에는 마네의 그림들을 풍자하는 카툰과 기사가 실렸다.
  
마네는 자신을 옹호하는 평론을 써 주었던 에밀 졸라와 소설가 프루스트, 시인 보들레르에게 자신의 고통스러움을 자주 토로했다. 그럴 때마다 에밀 졸라, 프루스트, 보들레르는 마네를 응원했다.
   
그의 그림들이 조롱받았던 이유는 그림의 주제로 등장한 여성들이 현실 세계의 여성들이며 누드로 등장한다는 이유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림에 누드로 등장할 수 있는 여성은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여신(女神)이어야 했다. 그런데 마네의 그림에 등장한 여성들은 여신이 아닌 매춘부의 모습을 한 채 정면을 주시하고 있으므로 그림을 바라보는 관람객을 현실의 그 순간에 동참하고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먹을 수 있는 욕이란 욕은 다 먹어버린 마네. 그는 실망하고 주눅 들어 그림 그리는 것을 포기했을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는 새로운 혁신으로 세상을 뒤집을 준비를 하고 있던 신참내기 화가들(나중에 인상주의 화가들이 되는)을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지원해주는 선배의 역할을 하며 자신의 예술 가치를 꾸준히 이어간다.
    
1880년 마네는 절친이자 미술품 컬렉터인 샤를 에프 루시에게 ‘아스파라거스 다발’을 판다. 800프랑이 그림의 가격이었지만 그림이 너무 맘에 들었던 샤를 에프 루시는 마네에게 1000프랑을 지불한다.

 
‘아스파라거스 다발’ 마네, 1880년, 캔버스에 유채, 46×55㎝, 독일 쾰른 발라프미술관
 
 
자신의 그림을 맘에 들어 하며 웃돈을 얹어 준 ‘절친’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던 마네.
  
마네는 그림 한 점을 더 그려 보낸다. 그리고 그 그림에 이런 메모를 동봉했다.
  
"자네에게 그림을 보내고 나니 아스파라거스 200프랑어치가 떨어져 있지 뭔가."
          
다발에서 떨어져 있어서 그랬을까? 그림 속 아스파라거스가 시들시들해진듯한 느낌이 들지만, 마네의 ‘우아한 유머’는 그가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는 주변사람들에게 자주 따뜻하고 배려심 넘치는 행동을 했다. 특히 가난한 모네와 인상파 후배들을 끊임없지 지원해주었다. 마네가 인상주의 스타일의 그림을 한 점도 그리지 않았지만 '인상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유다.
   
   
‘아스파라거스’ 에두아르 마네, 오르세미술관
   
   
시대를 앞서간 화가 마네. 끊임없는 조롱과 비난 속에서도 그를 지탱하게 한 건 세상에 대한 관심과 감사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싶은 건 하고 살자.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살자. 이왕이면 우아하게!
 
 
 
 

[입력 : 2018-12-09]   이수정 아인아르스 대표·작가 more 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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