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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보고 자빠지자

목숨 걸고 王초상화 그린 화가 한스 홀바인

토마스 모어, 토마스 크롬웰 그리고 한스 홀바인의 運命

글  이수정 아인아르스 대표·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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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한 점을 감상해보자. 날카로운 눈매에 꽉 다문 입술, 모피와 벨벳으로 만든 고급스러운 의복, 목에 두른 훈장 같은 목걸이는 이 남자의 지위를 짐작케 한다. 59×74.2cm 크기의 목판에 템페라로 그려진 이 그림은 뉴욕 맨해튼의 프릭 컬렉션의 소장품이다. ‘템페라’란 계란 노른자와 아교를 섞은 불투명 미술 안료를 말한다.
     
벨벳이나 모피의 느낌은 마치 사진을 보는 듯 정교하고, 파르스름하게 깎은 수염자국과 지적이고 완고해 보이는 눈빛은 이 그림을 그린 화가가 초상화에 탁월한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화도 아닌 템페라로 이렇게 그릴 수 있다니 타고난 재능에 노력이 더해진 위대한 걸작 앞에서 나는 한없이 경건해진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한국인들에게 ‘유토피아’로 잘 알려진 토마스 모어(1477~1535)다. 인문주의자이자 정치가였던 그는 탁월한 수완과 식견으로 영국의 헨리 8세의 신임을 얻어 대법관에 임명되었으나, 왕의 이혼에 끝내 동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참수당했다. 헨리 8세는 왕비 캐서린의 시녀였던 앤 불린과 결혼하기 위해 캐서린과 이혼하고자 했지만 이를 반대했다는 이유에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천일의 앤’이 앤 불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The Frick Collection Homepage
   
   
한스 홀바인의 작품 ‘토마스 모어의 초상’이 소장돼 있는 ‘더 프릭 컬렉션’의 Living hall의 모습이다. 만약 아무런 정보 없이 이곳을 방문했다면 '아...토마스 모어구나', 그리고 '토마스 크롬웰? 근데 이 사람은 누구지?'하고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방에 걸려있는 그림을 굳이 이렇게 진열해 놓은 프릭 컬렉션 측의 의도를 알아챈다면 그림 감상의 재미는 극대화된다.
       
가운데 벽난로의 좌측에 ‘토마스 모어의 초상’이 걸려있다. 그리고 벽난로의 우측에 걸려있는 그림은 ‘토마스 크롬웰의 초상’이다. 그는 토마스 모어의 정치적 숙적이자 모어의 사형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토마스 크롬웰 또한 토마스 모어와 같은 죄목인 반역죄로 참수된다. (아... 헨리 8세여!) 여기서 끝이 아니다. 토마스 크롬웰이 참수된 이유는 이 둘의 초상화를 그렸던 한스 홀바인 때문이다. 전생에 셋은 무슨 사이였기에...
         
여기서 간단하게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헨리 8세의 왕비들에 대해 잠시 알아보자.
    
영국의 국왕 헨리 7세는 당시 강력히 부상하던 에스파냐의 아라곤 왕국과 국교를 공고히 할 필요성을 느껴 장남(長男) 아서 왕자를 에스파냐의 공주 캐서린(1485~1536)과 혼인시킨다. 그러나 이듬해 아서 왕자가 사망하자 양국의 왕들은 이 결혼을 무효화시킨 후 둘째 헨리 왕자와 결혼시킨다. 헨리 7세가 사망하고 헨리 왕자가 즉위해 헨리 8세가 되었다.
    
왕비 캐서린은 왕자를 낳지 못했고(낳아도 요절하거나 사산) 마침 왕궁에 들어와 있던 앤 블린(1507~1536)에게 마음이 끌린 헨리 8세는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캐서린 왕비와 이혼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에서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기에 헨리 8세는 가톨릭과 결별하고 영국 국교회를 설립해 종교개혁을 단행한다. 그리고 앤과 결혼한다. 그러나 앤 또한 왕자를 낳지 못하고, 왕실 출신이 아닌 그녀를 제거하려던 세력들의 모함으로 간통죄와 근친상간 죄를 뒤집어쓰고 참수당한다(헨리 8세와 앤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뒷날 영국 함대의 바탕을 이룩한 엘리자베스 1세다.)
     
세 번째 부인 제인 시모어(1509~1537)는 헨리 8세가 가장 사랑했던 왕비였다. 27살의 늦은 나이에 사흘이나 걸려서 아들 에드워드를 낳았지만 산후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헨리 8세는 사후에 제인 곁에 묻히기를 원했다고 한다.    
    
네 번째 왕비는 독일의 작은 공화국 클레베의 앤인데 바로 이 네 번째 왕비 때문에 토마스 크롬웰이 처형당하게 된다. 네 번째 왕비의 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자.
  
네 번째 왕비 앤의 시중을 들다가 헨리 8세의 눈에 띈 캐서린 하워드는 19살의 나이로 47살의 헨리 8세의 다섯 번째 왕비가 된다. 어린 신부를 맞이하며 기쁨에 넘쳤던(?) 헨리 8세와는 달리 중년의 남편에게서 싫증을 느낀 캐서린은 자신의 정부(情夫)였던 프랜시스를 시종으로 삼아 곁에 두었고 그것도 모자라 이전의 구혼자였던 토머스에게 연서(戀書)를 보내는 등 이중생활을 했다. 결국 이것이 밝혀지고 왕비가 된 지 두 해만에 참수됐다.
     
여섯 번째 왕비 캐더린 파로(1512~1548)는 유일하게 헨리 8세보다 오래 살아남은 왕비다. 그러나 헨리 8세가 죽자 일 년 후 세상을 떠났다.
         
6명의 왕비의 운명에 대해 영국 본토에서는 이렇게 가르친단다. 이혼-참수-사망-이혼-참수-생존.
       
다시 네 번째 왕비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아들을 낳았던 세 번째 왕비 제인이 사망했으니 다음 왕비를 간택해야 했다. 당시 왕비를 간택하는 일은 국가 정책과도 관련이 깊은 일이었다. 헨리 8세는 대륙의 가톨릭 세력이 잉글랜드를 공격할까 긴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한 당시 최고 권력자이자 재상(宰相)이었던 토마스 크롬웰은 오늘날 독일의 라인라트지방의 작은 공화국인 클레브의 앤을 왕비로 천거했다. 헨리 8세는 왕비가 될 앤의 얼굴을 알 수 없었기에 그녀의 초상화를 그려오라고 궁정화가인 한스 홀바인을 독일로 보낸다.
    
홀바인이 그려온 20살의 앤의 모습을 본 헨리 8세는 무척 만족스러워했다. 기대에 부푼 헨리 8세는 정작 결혼식 날 앤의 얼굴을 보고서는 무척이나 실망했고, 결국은 파혼했다. 이미 왕의 행태에 익숙해진 의회에서는 이 결혼을 무효로 처리해주었다.
 
이 결혼을 추진했던 토머스 크롬웰만이 반역죄로 재판도 없이 참수당했다. 가까스로 홀바인은 죽음을 면했지만 하루하루 좌불안석으로 살았을 것이다. 클레브의 앤을 그리고 3년이 지나 홀바인도 사망하는데 헨리 8세에 의한 것이 아닌 당시 런던을 강타한 페스트 때문이었다.
 
 
캐더린 아라곤의 초상(호렌바우트作·왼쪽), 앤 블린의 초상(작자미상·중앙), 제인 시모어의 초상(홀바인).
 
클레베의 앤의 초상(홀바인·왼쪽), 캐더린 하워드의 초상(홀바인·중앙), 캐더린 파로의 초상(작자미상).
 
                                                  
한스 홀바인(1497~1543)은 30대 후반의 나이에 헨리 8세의 궁정화가가 되어 왕족과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홀바인은 주인공들의 지위를 정확히 상징적으로 묘사하며 인물의 심리를 꿰뚫어 표현하는 통찰력과 사실주의적 묘사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초상화가로 평가받고 있다. 역사에 길이길이 자신의 이름이 남겨질 것을 예상했을까? 인생의 후반부 3년간은 괴팍한 왕의 성정 때문에 마음 편히 살지 못했을 한스 홀바인. 그야말로 목숨까지 걸고 그림을 그려야했을 ‘화가’ 라는 극한 직업을 그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입력 : 2018-12-29]   이수정 아인아르스 대표·작가 more 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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