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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럼

깨어 조용히 그리고 간절히

“세계는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거대한 스펙트럼”

글  김재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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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한 기도를 이튿날에도 한다. 생활의 항상성은 우선 기도 지향의 일관성으로 나타난다. 단속적(斷續的)이지 않은 어떤 체계를 아날로그라 한다면 생활 혹은 기도는 확실히 아날로그적이다. 그러나 어제 기도를 한 바로 다음 날 같은 시각에 기도를 바친 장소는 얼추 25km쯤은 떨어져 있을 수 있다. 아니다, 공간은 얼마든지 더 멀리 아주 다른 곳이 될 수 있다. 연속적이지 않은 물리량을 디지털이라고 한다면 어제와 오늘 기도를 바친 곳은 확실히 디지털적이다. 

    

대수롭지 않은 일상의 전변을 너무 거창하게 표현한다고 타박할 일이 아니다. 한때 ‘돼지털’ 운운하며 아날로그에 상대해 디지털이란 말을 진보와 혁신의 키워드로 쓴 적이 있다. 가전 업체의 광고 영향도 있겠지만 확실히 디지털은 첨단의 이미지를 표상했다. 그런 만큼 아날로그는 구태의연한 보수성을 의미했다. ‘아날로그的!’이라고 하면 진보성과는 거리가 먼 농경적, 봉건적 문화를 떠올리고는 했다. 사람들은 손목시계를 사도 똑딱이는 디지털 전자시계를 선호했다.

    

그러나 삶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구별하지 않는다. 일상은 언제나 아날로그적이면서 디지털적이다. 기도 지향의 일관성만 아날로그적인 것이 아니며, 기도를 바치는 장소만 디지털적인 게 아니다. 기도를 필요로 하는 삶의 조건이 항상적인 만큼 기도로써 이루고자 하는 것도 저마다 다르다. 결핍은 언제나 아날로그적이며, 만족은 언제나 디지털적이다. 인간의 존재론적 본성은 연속적이면서 불연속적이다. 그러므로 ‘돼지털’ 운운하며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대별한 것은 전적으로 부당하다.

    

마찬가지로 세계는 77억 1457만 6923명의 남성과 여성으로 이루어진 체계가 아니다. 세계는 남성과 여성으로 대별되지 않는다. 무한히 다른 남성과 무한히 다른 여성들의 체계도 아니다. 세계는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의 거대한 스펙트럼이다. 남성 속에 여성이 있고, 여성 속에 남성이 있다. 내 안에 다른 내가 있고, 너에게 다른 네가 있다. 세계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무한의 체계이다. 세계의 궁극에는 무한 변주되는 영혼이 있다. 이것이 한 사람의 영혼을 온 세계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이다.

    

만일 시가 세계를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영혼에 ‘투사된’ 세계이다. 아니다, 세계는 영혼이 ‘표현하는’ 그 무엇이다. 그러므로 영혼이 무한한 것과 같이 시도 무한하다. 삶이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구별하지 않는 것처럼 시도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무한 변주 속에 있다. 한 사람의 영혼을 온 세계라고 할 수 있다면, 한 편의 시 또한 하나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시는 영혼이면서 세계이다.

    

그렇다면 ‘일상은 언제나 아날로그적이면서 디지털적’이라며 기도 지향의 연속성과 기도 장소의 불연속성을 거창하게 언급했던 것은 역시 옳지 않다. 또한 “새로운 시를 위해서는 언제나 떠나야 한다."고 했던 말도 부당하다. 시는 떠남과 떠나지 않음을 구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는 언제나 어디서나 내 영혼의 무한 변주와 함께 무한 운동 속에서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예전과 같이 기다리면 된다. 깨어 조용히 그리고 간절히.

    

그러므로 파주 운정을 ‘구름 우물’이라 말하지 않기로 한다. ‘雲井’은 그것으로 고유화되지 않는다. 운정은 종로 청운(靑雲)과 부암(付岩)과 다르지 않고, 울산과 봉화와 삼척과 다르지 않다. 내 영혼은 운정을 내가 지나 온 다른 고장들과 마찬가지로 내게 허락된 시간 동안 잠시 거처하는 곳으로 이해한다. 나는 운정에서 새로운 일기를 쓰겠지만, 그것은 예전과 같이 깨어 조용히 그리고 간절히 기다리는 일기일 수밖에 없다.

  

  

  

[입력 : 2019-05-27]   김재홍 기자 more 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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