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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예된 관계의 시학

내부적 모순 성찰하고 외부 수용력 확대하는 두 작품

천수호 「세이런 노래방」 vs 전원책 「강가에서 시를 읽다」

글  김병호 협성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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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불완전성을 통해 선험적 상실을 체험의 진정성으로 바꿔내려고 노력하는 시인 천수호. 이러한 노력은 “나를 스쳐도 찢기지 않는” 너에 대한 심미적 감성을 미학적 반영물로 만들어내고, 난파(?)시키지 못하는, 혹은 불러 세우지 못한 안타까움과 애잔함에 시인의 비의적 욕망이 침윤되게 만든다. (중략) 전원책은, 이제는 그곳에 갈 수 없는 사람의 내면 풍경을 이렇게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언제나 그곳에 남아 있”는 사랑은 오롯이 그만의 것이다. “안녕이라고 말하지 못해 자주 뒤돌아본다”는 화자는 다시 돌아온 그 자리에서도 차마 작별인사를 건네지 못한다. 아마도 영원히 작별을 고할 수 없어 보인다. “내 사랑은 언제나 그곳에 있는데/나는 너무 멀리 왔”기 때문이다.
 
요즘 발표되는 시들을 살펴보면 현대사회에서 겪는 상실의 체험과 은폐의 욕망이 부딪치는 자리에 놓인 작품들을 다수 발견할 수 있다. 시인들은 더 이상 은폐할 수 있는 진실은 사라지고 값싼 욕망만이 세련되게 외피를 갈아입는 현실에서 자연스레 ‘마음’의 흔적을 따라나서거나 혹은 초월적 위치에서 삶을 이해하려는 태도를 견지한다.
  
혹자들은 이러한 흐름을 자칫 문학이 하나의 신비주의로 치달을 수 있는 위험으로 파악하고 경계하기도 한다. 그들의 우려처럼 시인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적 행위가, 실제의 구체성을 상실한 채 그저 관념적 ‘마음’의 영역에서 너무 쉽게 욕망이나 갈등의 대상들과 화해하고 타협하는 태도는 시의 본질적 울림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자세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살펴볼 작품들은 이러한 기계적 양식에서 벗어나 시인과 작품의 내부적 모순을 성찰하고 외부의 수용력을 확대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동안 갈등하는 내외적 대상과의 화해를 시도하면서 포용력을 통해, 오래 대립하던 타자를 시인과 같은 동일자로 수용하는 내면의 궤적을 보여준다. 특히 사회적 폭력보다는 존재적 고립에서 벗어나 화해의 전기를 마련하고 그것들과의 갈등을 넘어 시적 연대감을 확보하고자 하는 작품들을 골라보았다.
   
   
얼굴의 기미는 닦아내고 새의 목을 달자
밤이 오면 어떤 기미도 다 덮일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자
그러면 너여, 내게 올 거니?
발톱은 가짜 대추나무에 걸려 잎을 훑는다
푸른 대추알이 후두둑 떨어지도록
너여, 내게로 오는구나
바람도 없이 왔지만
깃털 날리며 부르는 노래
귀를 막아도 뒤틀리는
너여, 내게로 잘 왔구나
무슨 노래를 불러줄까 망설임도 없이 마이크를 잡고
밀랍 따위로는 귓바퀴를 막지 못하지
칭칭 감긴 로프를 풀어다오
스텝은 자유로우니까
떠나지 못하도록 가사를 쓰고
떠나갈 듯 부르는 노래
깃털이 구렁이가 되어도
발톱이 지느러미가 되어도
불빛이 좁은 홀을 훑고 또 핥는다
너여, 나를 스쳐도 찢기지 않는구나
 - 천수호, 「세이런 노래방」 전문
 
   
 천수호 시의 매력은 체념적 결의를 통해 자신의 비애를 감당하는 지점에서 발아된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밀린, 고통을 달래는 행위는, 삶의 중심에서 비껴서 있음을 스스로 깨닫는 현장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뱃사람들을 유혹해 배를 난파시키는 신화 속의 마녀 ‘세이런’은 몸의 반은 새이고 나머지 반은 사람인 인물이다.
  
노래방이라는 현실적 공간에 ‘세이런’을 배치하여 공간 이동의 낯설음을 지향하는 것, 스스로를 비현실적 존재로 만들려는 욕망은 자유로움에 대한 욕망을 오히려 극대치로 높여놓는다.
 
작품 속에서 화자는 억압적이라고 믿는 현실과 나를 스쳐 지나가는 ‘너’ 사이에 존재하는 심리적 불균형을 감각한다. 좀처럼 오지 않는 너를 유혹하기 위해, 새의 목을 달고, 유혹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화자의 내면적 심도는 너에 대한 간절함과 욕망으로 시의 표정을 바꾸어 놓는다. 스스로를 대상화하고 이미지화하는 일과 시적 대상을 바라보는 자신을 정립된 자아로 인식하는 일 사이의 간극은, 자기반성과 예정된 비극의 색채가 강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 바라보여지는 것은, 보는 주체의 자리바뀜 속에서 곤혹스러워하는 자신이 어느 순간 피사체로 전이되는 모습으로 대부분 연출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시인은 기표상의 주체와 기의상의 객체 사이를 떠도는 미묘한 순간을 체험하게 되고 이를 독자와 공유하고자 한다. 일종의 유예된 관계, 생의 욕망이 함몰된 구체성 속으로 스스로를 유예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너는 “바람도 없이" “귀를 막아" 뒤틀리면서 내게 왔지만, 화자는 스스로를 소외의 지대로 내몬다. 대상에 대한 이해가 배제된 비켜섬의 방식인데, 이때 시인은 ‘너’의 위치나 심리보다는 자신의 또 다른 자아인 시적 화자에 집중하게 된다. 시인으로서 바라보아야할 지평이 스스로에게 있음을 이미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천수호는 화려하고 극도화된 외연의 언어가 아니라 가장 내밀한 감성의 도전적 언어를 통해 삶의 비의성을 관통하고 있다. 이는 불가능한 연애나 불통의 이미지를 재생산해내며 의미망을 확대시키는데, 언어의 일상적 층위에서는 다루기 힘든 감각의 소산이다. 자신의 실존을 은폐하거나 위장하면서, 생의 욕망과 절망의 교차점을 지나면서, 시인 자신의 실존을 다시금 모색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그는 언어의 불완전성을 통해 선험적 상실을 체험의 진정성으로 바꿔내려고 노력하는 시인이다. 이러한 노력은 “나를 스쳐도 찢기지 않는" 너에 대한 심미적 감성을 미학적 반영물로 만들어내고, 난파(?)시키지 못하는, 혹은 불러세우지 못한 안타까움과 애잔함에 시인의 비의적 욕망이 침윤되게 만든다.
  
 
내 사랑은 언제나 그곳에 남아 있다.
오래된 길
빛바랜 사진 속의 담벼락, 구겨진 간판들
천천히 걷는 사람들, 아주 느리게 내리는 이슬비
그곳에는 11월 늦가을비가 내려
아직도
낡은 창틀 금 간 유리창을
슬픔처럼 흘러내릴까.
바람이 낙엽들을 아무렇게나 쓸어가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전차가 와서 낯선 사람들 내려놓고 가면
다시 길은 적막을 되찾는다.
어쩌면 비 개인 뒤 휘영청 달이 떠서
빈 의자에 하얗게 무서리가 내려앉는다.
다들 어디 간 것일까.
내 사랑은 언제나 그곳에 있는데
나는 너무 멀리 왔다.
여전히 달빛 산란하는 강가에서
너무 많은 걸 훔쳐본다.
흐르는 것마다 감추고 있는 사연들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들을 훔쳐본다.
안녕이라고 말하지 못해 자주 뒤돌아본다.
흐르는 시,
오직 눈물 한 방울을.
 - 전원책, 「강가에서 시를 읽다」 전문
  
 
길의 끝, 강가에 서 있는 화자는 삶의 현존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이미 헤아린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자기 위안에 사로잡혀 있다. 물론 현존의 공간과 길의 끝에 절멸의 심연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현실적 경계의 지점에서 화자는 지나쳐버린 시간에 대한 호기심과 현존의 곤고함에서 비롯된 후회를 토로하고 있다. 이미 오래 전에 떠나온 사랑에 대한 그리움과 지금은 돌아갈 수 없는 그 시간을 인식하는 방법은, 결국 길이 끝나는 강가에 서서 현실을 체득하는 방식밖에 없는 듯하다. 부재를 통해 드러나는 시적 그리움은 “흐르는 것마다 감추고 있는 사연들"을 간파하는 화자의 시선을 통해 불가항력의 몸부림임을 인정하게 된다.
     
이때 화자가 강가를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시적 추억의 공간이 아니다. ‘강가’는 현실의 강박 관념을 벗어나는 과정에 대한 의식과 관계가 편재된 장소로, 화자가 사랑의 부재를 인식하고, 공동화된 내면을 위로하는 공간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화자가 강가를 찾는 행위는 삶의 질곡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능동적인 자기 위무의 행위이면서도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들"에 대한 본능적 그리움이기도 하다.
   
시를 쓰거나 시를 읽는다는 행위는 삶의 의미를 묻는 근본적이면서 전통적인 방법의 하나이다. 화자에게는 자신이 잃어버린 사랑, 부재가 낳은 열망 자체가 ‘강가’가 된다. 그리움과 방황으로 위장된 세계, 시간의 회로와 삶의 방향이 일치되어야 하는 현실적 지배 공간에서 벗어나 시인은, 삶의 조건과 현실의 논리에 적용되지 않는 자신만의 치유 공간인 ‘강가’를 만들어낸다.
   
화자는 삶의 아름다움이 제거된 ‘강가’에서 시를 읽으며, “다들 어디로 간 것일까" 묻는다. 강가에서 ‘답’을 구하는 일의 어리석음 혹은 부질없음은 이미 그의 시에 강하게 투영되고 있다. 결국 전원책의 시는 사랑의 상실과 부재가 보편적인 현실과 맞닥뜨리는 과정에 집중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실의 강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충동과 그리움에 내몰려 강가에 다시 서게 된 과정은, 화자가 삶의 갈피마다 만들어 놓은 의식의 방황과 다시 삶의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는 의식의 방황이 직조한 ‘시간의 길’이다.
  
길이란 이렇게 늘 준비되어 있는 방황이 아닐까. “빛바랜 사진 속의 담벼락, 구겨진 간판들"과 “낡은 창틀 금 간 유리창"에 남아있는 그곳에는 모든 것들이 “천천히", “아주 느리게" 흘러간다. “안녕이라고 말하지 못해 자주 뒤돌아본다"는 화자는 다시 돌아온 그 자리에서도 차마 작별인사를 건네지 못한다. 아마도 영원히 작별을 고할 수 없어 보인다. “내 사랑은 언제나 그곳에 있는데/나는 너무 멀리 왔"기 때문이다.
  
전원책은, 이제는 그곳에 갈 수 없는 사람의 내면 풍경을 이렇게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언제나 그곳에 남아 있"는 사랑은 오롯이 그만의 것이다. 
 
 

[입력 : 2019-01-28]   김병호 협성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more 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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