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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표현과 감정의 누설

조용미 「흰색, 침묵」 vs 허연 「상수동」

글  김병호 협성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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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을 때, 시에서 표현되지 않는 감정은 일종의 압박감을 동반한다. 그것이 작품 안에서 구현되고 독자의 의식 속에 들어와 그 압박감이 제거되었을 때, 시인의 그 동일한 감정은 고양되거나 편안해지는 새로운 느낌으로 독자에게 전이된다. 이러한 느낌은 일종의 안도감과 비슷한데 그것을 특수한 심미적 감정으로 부를 수 있겠다.
  
오늘 읽을 두 편의 시를 통해 우리는 감정이 표현되기에 앞서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이 예술적으로 표현된다는 특수성을 갖는 특수한 감정이 아니라 시로 표현될 때 수반되는 정서적 색조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시를 통해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을, 감정을 누설하는 것 즉 감정의 징후들을 전시하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진정한 의미에서 시인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 명료성과 이해가능성을 하나의 표지로 삼는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누설하고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은밀하고 절단된 부분을 시인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도시는 왜 이렇게도 조용한 걸까 거미줄처럼 길은 안으로 안으로 향한다 작은 성당에 들어갔다 노인 한 사람이 제단 앞 측면 자리에 앉아 있다 문 앞에서 천장과 창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노인과 나는 다른 공간으로 멀어졌다 잠시 후 청년이 들어와 천천히 그의 앞으로 가 섰다 그들은 서로 마주보았다
 
 아무리 멀리 떠나도 거기에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있다
 노인이 일어나 그를 껴안았다 그들 앞에 죽은 이가 놓여 있음을 그 순간 알게 되었다 노인이 앉아 있던 시간도 청년이 내 옆을 지나 앞으로 걸어나간 순간도 그저 고요했기에 그들의 호흡에 조금의 일렁임도 없었기에 슬픔의 기류를 감지하지 못했던 것
 그들은 나란히 앉아 말없이 관 속에 누워 있는 죽은 자를 바라보았다 내가 성당에서 들은 소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누군가 죽은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고, 그 죽음은 아무런 소리도 필요치 않았다
 하루쯤 지난 누군가의 손을 잡아보려 한 적 있다
 이 도시는 어떤 죽음을 침묵으로 애도하고 있다 식당도 텅 비어 혼자 달그락거리며 짧은 식사를 마쳤다 발을 겨우 디딜 만큼 좁은 계간이 위로 구불구불 이어진 미로의 흰색 골목은 깊이를 높이로 대신한 걸까
 제단을 향해 누워있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
 두 사람이 침묵으로 지키고 있는 자의 죽음이란 마침표처럼 단정하여 내가 품고 있던 말줄임표는 낯선 도시에서 죄 없이 자꾸 무거워졌다 치스테르니로의 골목과 흰 집과 계단들은 모두 침묵의 복잡한 기호들 검은색 슬픔을 흰색으로 완고하게 덧칠한 계단과 골목들이 나를 포위했다
-조용미 「흰색, 침묵」 전문
   
   
조용미의 시는 삶과 죽음의 이편과 저편, 존재하는 것과 부재하는 것, 현실과 내면 사이의 고착과 좌절, 그 아슬아슬한 사유 위에 놓여있다. 현대 사회에서 구획된 도시적 삶은 개인 혹은 공동체적 욕망의 자연스러운 생성과 격발을 봉쇄하고, 스스로를 억압하는 욕망만을 허가한다.
 
시인은 성당이라는 종교적 공간을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 혹은 윤곽들 사이에서 인간 내면과 사물의 표피들이 일으키는 미세한 마찰음을 독자적인 상상력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특히 성당은 도시 안에 위치한 소도蘇塗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시인은 의도적으로 우리 삶의 한복판이 아닌 이탈리아의 ‘치스테르니로’의 풍경을 통해 시간과 공간의 중첩된 경계를 설정한다. 낯선 이방의 도시에서 펼쳐지는 죽음은 삶과 죽음의 잉여가 어떤 형식으로 경계를 만들어내고 있는지를 확인하게 한다. 
 
화자는 지각 속에서 대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대상은 화장의 몸에 상응하여 경험되면서 자기의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작품 안에서 그려지는 ‘노인’과 ‘청년’ 사이의 침묵은 단순한 무음無音의 차원이 아니다. 이들의 침묵은 그 자체로 소리와 의미를 껴안는다. 그리고 이들 앞에 놓인 죽음은 생명력의 고갈이나 생장의 정지를 뜻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의 영혼과 내면에 죽음이라는 관념을 각인시키며 관계의 심층에 녹아든다. 그래서 죽음은 끝없이 삶에 간섭하고 일상의 영역을 침범하기까지 한다.
 
시인은 죽음을 통해 두 사람을 삶에 대한 타자로 머물게 함으로써, 삶과 인간에 대한 근원적 물음들을 방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만일 죽음이 없다면 삶이란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시인은 우리를 우리 자신의 존재 근거와 모순에 대한 근원적 물음으로 이끌고 간다. 시인은 죽음에 대한 애도 방식을 ‘침묵’으로 선택했다. 그러나 화자가 지닌 침묵의 말줄임표는 마침표처럼 단정한 죽음 앞에서 한없이 무거워진다.
  
조용미 시인의 눈길은 삶과 죽음으로 구획된 공간 속에서 외롭고 쓸쓸하지만 알 수 없는 고립의 공간에 놓이게 된다. 이 작품에는 현대적 삶의 양상들이 강요하는 경계의 사유에서 고통과 상처가 지닌 작위성을 넘어서는 선험적 직관을 보인다. 삶과 죽음의 틈새에서 “완고하게" 포위된 화자는 감각과 사고를 변화시켜, 사물의 풍경이면서 이 풍경을 목도하는 화자 마음의 풍경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강물에 잠겼다. 당신
밥솥에 김이 피어오를 때
이대로 죽어도 좋았던
그 시절은 왜 이름조차 없는지
당신이 울지 않아서 더 아팠다
꽃 이름 나무 이름
가득 써 있던 당신의 노트도 늙어갔고
낙서가 경전처럼 빼곡했던
발전소 담벼락과
취기에도 자주 잠이 깨던
강변을 떠나며
그 아득함에 대해 생각했다
당신
말더듬이 같은 달밤을 두고 갔다. 멀리
자취집 옆 키 큰 꽃나무에
밤은 또 쌓였고
잘못 걸린 전화가
문득 비가 그쳤음을 알려준다
이제 저 강물 속에서
당신을 구별해낼 수 없다
-허연 「상수동」 전문
 
시인은 상투적 서정을 거부하고 섬세하고도 격렬한 비유와 이미지로 추억을 회상한다. 그는 내면의 파동에 물든 언어들을 물리적 공간 위로 이끌어내면서 감각되는 대상과 감각하는 주체를 뒤섞어놓는다. “말더듬이 같은 달밤을 두고" 멀리 간 ‘당신’과 강물 속의 ‘당신’은 감각의 심부 또는 그 너머 어떤 보편적 깊이를 지향하는 감각적 향유 그 이상이 된다.
  
작품 안에서 ‘당신’은 상실되고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속되고 유지된다. 지속하는 것의 소멸적 계기와 스러져가는 것들의 재귀적 계기를 화자가 작동시킨다. 이 비밀스런 작용은, 부재하는 것의 다가올 존재를 현시하는 현상적 욕구에서 비롯된다. 표현에의 의지, 기존 삶의 항체적 계기는 “자취집 옆 키 큰 꽃나무"를 통해 발현된다. 어떤 감정들을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다른 감정들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만드는 특별한 경우에, 그 배후에 궁극적 동기들이 있는 것이다.
    
시인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감정을 엿볼 수 있도록 허락하는 경우에만 그렇다. 이것은 어떤 감정을 자신이 먼저 의식하지 않는 한, 어떤 이유로 그 감정을 공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한 것인지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울지 않아서 더 아팠다"며 “이대로 죽어도 좋았던/그 시절"을 그 아득한 시간을 추억하는 것은 화자가 맹목과 불투명성을 감당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자는 시인의 감정을 의식하고 집중하게 된다. 예술이 감정의 표현을 의미한다면, 예술가는 절대적으로 정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시인이 정직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시인은 정직한 경계 안에서 예술가가, 시인이 된다는 뜻이다.
     
“저 강물 속에서/당신을 구별해낼 수 없다"는 화자의 고백은 삶의 어떤 계기가 시작되거나 끝나는 지점이 아니라 이런 시작과 종결, 그 사이에 위치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영원성 또는 지속성은 떠나간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은 대조적 대비를 이루기보다 융합적 화해를 이룬다. 그것은 어떤 사라지는 순간 속에 녹아들고 있기 때문이다.
 
다채롭고 풍요로운 감각의 장에서 화자의 시선은 ‘그 시절의’ ‘당신’에 머물러 있다. 기억과 풍경이 겹쳐진 부분에서 화자는 풍경 그대로의 질서를 내보이는데, 내면이 조직하는 정서가 아니라 침묵에 가까운 감각들이 화자의 서정적 집중에 봉사하게 된다. 시인은 감각들이 지닌 이미지의 동질성을 통해 풍경 속에서 존재와 시간을 맺는다.
 
 
 

 

[입력 : 2019-05-09]   김병호 협성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more 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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