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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럼

주여, 삭치소서

“인간은 기억하는 만큼 혹은 기억을 넘어서 반성하는 동물이다”

글  김재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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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개거나 지워서 없애 버리는 것을 삭친다고 한다. 세금이나 빚을 탕감해 주는 것도 삭친다고 한다. 어떻든 삭친다는 건 없애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430)가 “주여, 비나니 삭치소서."라며 “그를 데리고 ‘심판으로 들어가지 마옵소서.’(시편 143,2)"라고 외친 것은 자신의 죄에 대한 가혹한 자기 체벌이다. 내 죄에 상응하는 죗값을 치러야만 죄를 삭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삭치소서.’란 말은 곧 ‘벌주소서.’란 말이다.

  

죗값을 치르고서라도 삭칠 수 있다면 그것은 미구에 닥칠 참혹한 심판에 견주어 차라리 은총에 가깝다. 그러니 용서를 빌기보다는 죄짓지 말 것이며, 일단 죄를 지었다면 용서가 아니라 벌을 청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돌이켜 지저분한 내 과거와 내 영혼의 육체적 부패를 생각하고 싶다."면서 그것들이 좋아서가 아니라 ‘내 하느님’을 사랑하고 싶어서라고 『고백록』(Confessiones)의 집필 동기를 적었다. 그의 ‘고백’은 죄를 삭치기 위한 가혹한 자기 체벌이었을 뿐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기림의 표현이었다. ‘Confessio’는 죄의 고백과 동시에 ‘님 기림’이라는 두 가지 뜻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마니교와 신플라톤주의와 같은 신학적 도전도 거셌지만, ‘정욕의 가시덤불’ 또한 오랜 동안 고통을 주었음이 그의 ‘고백’ 여기저기에 기록돼 있다. “정욕의 가시덤불이 내 머리에 뻗어 올랐어도 뽑아줄 손이라곤 하나도 없었습니다.", “나는 한 여성을 두고 있었습니다. 떳떳하게 결혼으로 안 여자가 아니오라 지각없이 들뜬 내 정욕이 찾아낸 사람인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정욕의 가시덤불’ 만큼 시도 때도 사람도 가리지 않고 고통을 주는 것은 없다. 그것은 존재론적 고통이다. 마니교도 신플라톤주의도 인간적 고통에서는 비본질적이다.

  

가톨릭 신자들은 고백성사를 통해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우선 자신을 돌이켜 죄를 성찰해 내고, 그렇게 찾아낸 죄를 통렬히 뉘우치고(통회) 다시 죄를 짓지 않기로 결심한다(정개). 그런 연후 사제에게 고백하고 그 처분에 따라 죄의 나쁜 결과에 대해 보상하는 보속(補贖)을 실행한다. 가톨릭 신자만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잘못을 반성할 줄 안다. 인간은 기억하는 만큼 혹은 기억을 넘어서 반성하는 동물이다.

  

1600년 전의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이 혹은 달리 나는 고백했다. “주님, 저의 끊이지 않는 음심(淫心)을 제가 능히 다스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고백성사만 아니라 수시로 기도 속에서 반성했다. 음심은 다스릴 대상인가, 끊어 버릴 대상인가. 음심은 대상인가 내부인가. 음심으로 총칭한 수많은 음탕과 간음과 불륜과 폭력 사이로 이미지와 이미지들이 넘쳐나는 참혹한 야만의 순간들을 끊어낼 수 없다. 반성은 아우구스티누스와 같더라도 반성의 결과는 그와 너무나 다르다.

  

매일 아침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평화로 이끌어 주실 것을 기도하면서도 시시각각 꿈틀대는 내 안의 짐승을 나는 느낀다. 짐승은 예측할 수 없는 어느 한순간 나를 박차고 나와 행패를 부리고 능욕을 일삼으며 추악한 야수의 본색을 드러낸다. 통제 불능의 음심에 반성하는 인간의 반성은 끝이 없다. 이런 음심을 인간의 동물행동학적 양상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그만큼 인간이 이룩한 보편 윤리와 사회 체계가 견고하다는 뜻이고, 그 윤리와 체계가 인간 생존의 조건이 되었다는 방증이다. 만일 짐승을 동물이라고 한다면, 자연에 순응하는 동물들의 순연한 생태를 ‘음심’에 빗댄 것이 차라리 더욱 죄스럽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내가 없는 자는 어떻게 하면 주께 의합할까 하고 주의 일을 생각하되, 아내가 있는 자는 어떻게 하면 아내의 마음에 들까 하여 세속 일을 생각"한다(코린토1서)는 사도 바오로의 말을 따라 여성과 자식을 넘어 ‘정욕의 가시덤불’을 스스로 뽑아내었다. 무절제한 정욕의 과잉 표출과 성적 대상에 대한 무분별한 폭력성이 도처에서 드러나는 오늘날 신을 향해 또 인간을 향해 스스로 거세까지 결행했다는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와 마찬가지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은 번뜩이는 칼날이 되어 세상을 응시하는 것 같다. 그는 평생을 바쳐 성인이 되었다.

  

“주여, 삭치소서."를 외치는 순간의 진실을 잊지 않아야겠다. 생의 행복과 죽음의 구원을 비는 간절한 마음만큼 용서를 빌기보다 죄를 짓지 않고, 불현듯 죄를 지었더라도 용서가 아니라 먼저 벌을 청해야겠다.

  

  

  

[입력 : 2019-07-18]   김재홍 기자 more 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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