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떠난다. 지난 10년 동안 살던 곳에서 낯선 고장으로 옮긴다. 늘 그렇듯 새로운 곳에 대한 기대보다 살던 곳을 떠난다는 아쉬움이 더 크다. 삼척에서 울산으로 서울로, 또 아파트에서 빌라로 주택에서 아파트로 살던 고장도 사는 집도 끝없이 바뀌어 왔다. 그만큼 기대보다는 아쉬움을 반복해서 느끼며 살았다. 어쩌면 바로 그 아쉬움이 시의 바탕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결코 그런 순간들을 즐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 곳에 오래 살며 자신이 사는 고장을 깊게 이해하고 가족과 친지와 이웃과 함께 어떤 공통의 정감을 느끼는 것은 언제나 행복한 일이다. 그런 속에서 나무와 꽃과 풀과 대화하고 산과 들과 하늘을 우러르는 시를 적는다면 그것은 가히 전원시(田園詩)의 진경이 아닐 수 없겠다. 전원의 삶이 현대인에게 어떤 원형으로 상정되는 그만큼 자연의 향취를 머금은 서정시는 위로와 위안의 예술이 된다. 공단과 산업화를 기반으로 한 대도시 생활이 주축을 이루고 있음에도 이른바 순수 서정시를 찾는 것은 일종의 원형 회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떠나지 않는다면 시(詩)는 있을 수 없다. 새로운 시를 위해서는 언제나 떠나야 한다. 시를 위하여 이전의 시적 경향이나 정서로부터 떠나야 한다는 얘기만이 아니다. 몸이 실제로 떠나야 한다. 물리적 이동이 있고서야 새로운 시가 있을 수 있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떠남은 그 자체로 시적 변화의 근거이다.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의 관점주의와 같이 바라보는 물리적 세계가 달라지지 않고서야 시인의 관점은 변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술어(述語)로써 포함하고 있는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는 세계를 향한 창이 없다. 온 세계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세계를 향한 존재가 아니라 세계 자체이다. 다만 모나드는 자신이 포함하고 있는 세계 전체가 아니라 부분만 펼칠 수 있다. 이 부분이 곧 ‘관점’이다. 따라서 라이프니츠의 관점은 주관적 가치관이 아니라 물리적 세계의 펼쳐진 부분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시를 위해서는 언제나 떠나야 한다고 할 때 그 ‘떠남’은 부분의 펼쳐짐, 즉 관점의 이동이다.
이것은 물질과 정신의 이분법이 아니다. 물리적 이동과 정서적 변화를 전제로 한 시적 변증법도 아니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지 않는다. 오히려 온 세계의 모든 가능한 사건들을 조화로운 술어로써 포함하고 있는 대통합의 일자(一者)이다. 이는 어떤 경우에도 대립과 갈등을 조장하지 않는 진정한 대긍정의 사유다. 그래서 떠남은 비록 내게 아쉬움을 주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가 펼쳐지는 인과율이 되었던 것이다.
사랑은 고통으로
슬픔은 희망으로
이별은 그리움으로 절망으로 만남으로
관점은 언제나 잘리고 주름지고 펼쳐지지
너를 향한 관점은 너에게
나를 향한 관점은 나에게
- 졸시, 「관점 혹은 관점주의」 중에서
그래서 떠남 혹은 이별을 아쉬워하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내게 포함된 나의 어떤 주름이 펼쳐지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내게 주어진 술어의 현실화이다. 떠남도 이별도 내게 포함된 것이며 그리하여 나타날 시는 그것의 표현태이다. 시인의 떠남은 시적 변화로 나타난다. ‘떠나서’ 새롭게 표현된 세계는 이전의 작품에 나타난 정서와 미의식에 변화를 줄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새로운 언어로 나타난다. 새로운 곳에서 만나는 새로운 명사는 술어의 현실화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어쩌면 관점주의는 ‘거자필반’(去者必返)의 불교적 사유와도 맥락적으로 연결된다. 떠남은 반드시 무언가를 만나게 한다. 그럼에도 아쉽다. 10년을 살며 익숙해서 편안한 골목길과 산과 바람과 나무와 풀을 떠난다는 것은 어쨌든 아쉬운 일이다. 하릴없이 그 아쉬움마저 긍정하기로 한다. 이번에는 어떤 만남이 있을지 궁금하다. 부디 새로운 시와의 떨리는 만남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