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와 폭우·폭염이 계속되는 8월에 신간 장편소설이 서점가에 등장했다. ‘동학사 가는 길’(이른 아침)이라는 제목이 이채(異彩)로웠다. 저자는 안병호(69) 작가. 그는 ‘천년의 불꽃’ ‘오타 줄리아’ ‘아름다운 사람 루이델랑드’ ‘어링불’ ‘네가 내게서 빛날 때에’ ‘브뤼기에르 주교’ ‘한국 이야기 등을 썼다.
‘동학사 가는 길’은 어떤 소설일까?
소설은 가짜가 진짜로 유통되고, 진짜가 가짜로 매도되기도 하는 미술판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엮었다.
“얼마 전에 L화백의 그림이 몇 억 원인가 팔려 나갔다는 기사 났었던 거 기억해?"
“알아요. 경매를 통해서 엄청 비싼 가격에 팔렸는데, 느닷없이 어떤 감정가가 그 그림 가짜라고 기자 회견을 하고, 그림을 판 사람은 그 감정위원이 헛소리를 한다며 고소했다는 뭐 대충 그런 거 아니었나?"
“맞아. 그리고 며칠 전에는 그 그림이 가짜라고 기자회견을 했던 감정위원이 그림을 판매한 화상(?商)을 상대로 맞고소 했지."
“근데 그게 뭐가 이상해? 그림판에서는 흔한, 그저 그런 이전투구 아닌가?"
서울 중앙지검 한대희 검사가 식탁에 앉아서 조간신문을 읽으며 자신의 아내와 나눈 대화다. 물론 소설 속 이야기다.
‘그림판에서 흔한 이전투구’-어쩌면 우리의 주변에서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는 현실적 일일지도 모른다.
검사 한대희는 운명적으로 그림을 사고 판사람 모두 진짜라고 말하는 그림이 사실은 위작(僞作)이라며 한 감정전문가가 고발한 사건을 맡게 된다. 압수수색 결과 화상의 비밀창고에서 유명 화가의 가짜 그림들이 수십 점 쏟아져 나오고, 피의자는 결국 구속된다. 한대희는 희대의 사기 사건을 해결한 검사로 명성을 얻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림이 가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증거들이 꼬리를 물어 당황해하기도 한다.
소설에는 L화백·P화백·C화백이 이니셜로 나온다. 실제로는 누구나 다 일 수 있는 이중섭·박수근·장욱진이라는 유명 화가들이다.
한대희 검사가 마지막에 마주친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가짜와 진짜를 가르는 경계는 정말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흑백의 논리에 익숙해진 우리의 일반적인 관습일 뿐인가? 위작 논란을 둘러싼 사건의 해결 과정을 통해 우리 시대 미술판의 어두운 그림자가 걷혀지는 것일까.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본다.
“L화백과 P화백의 가짜그림으로 전시회 개최를 시도하고, 일부 그림을 거액에 유통시킨 사건을 적발한 검찰이 보강 수사 과정에서 위작으로 추정되는 유명 화가의 그림을 수십 점 새로 발견했다."
소설에서 주인공 한대희 검사가 법적으로 내린 결론이다. 법이 아닌 개인적인 결론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그림에는 가짜와 진짜의 경계가 없었다. 그림은 그 자체로 숭고하다. 그림은 그림이지 진짜고 가짜고 판정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다. 그림을 보는 당사자 자신이 책임질 일이다. 그림은 우리의 영혼을 위로해주기도 하지만 잠자고 있는 양심을 일깨워주기도 한다. 그리고 먼 미래를 향한 꿈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한 그림은 위대하다. 그러한 그림이 위대한 것은 그런 화가가 위대하기 때문이다."
소설 속 동학사의 이야기
동학사는 충남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에 있는 사찰이다. 소설에는 ‘동학’이라는 이름과 함께 1977년 7월 10일의 날짜와 C화백의 사인도 들어 있는 그림이 등장한다. 작가는 “박정자삼거리라는 지명도 그대로 있고, 풍경이 다소 달라졌지만 그림 속의 로타리를 연상시키는 장소도 여전히 남아 있다"고 한다. 물론 소설을 통해서다.
하지만, 이 그림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C화백의 제자인 최교수가 기고한 글에 다음과 같은 글을 통해서 유추해본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선생님이 한창 매직 그림을 그릴 때였다. 한 뭉치를 그려놓고 보라 하시면서 한 장 가지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동학사에 몇 번 갔었는데 갈 때마다 비가 온다. 그런 이야기였다. 나는 그때 어찌나 우스웠든지 체면 불구하고 배를 쥐고 웃었다. 구름이 몰리다보면 비가 되는데, 용은 구름을 몰고 다닌다는 말이었다. 그러니 자기가 용과 같다는 말씀이 아닌가."
‘동학’이라는 그림은 어떻게 소설 속에 등장하는 것일까.
그림에 관심이 많았던 주인공 한대희 검사가 황학동 ‘김박’ 노인으로부터 산 것이다. 고작 8절 크기의 켄트지를 4등분한 작은 그림 5장과 천막지에 그린 1장이었다. 연필로 그린 크로키와는 질감이 다르게 매직 펜 같은 것으로 그린 약화들이었다. 유화가 아니어서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나 샀다. 소설 속 두 사람의 대화도 흥미롭다.
“여기서는 물건 만 보고 사거나 팔거나 한다는 얘기군요? 책임은 누구도지지 않고."
“맞아유. 진짠지 가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으니까."
“값은 어떻게?"“한 장에 3만원씩 주시면 됩니다."
“그럼 18만원인데 몽땅 15만원 하시지요."
소설은 C화백이 그림일기를 쓴 것과 아들을 잃은 사실에 대해서도 자세히 썼다.
“C화백이 그림일기를 쓴 1977년과 1978년에 그는 경기도 덕소에서의 생활을 접고 서울 종로구 명륜동 한옥에 기거하고 있었다. 그 다음 해인 1979년은 그에게는 잊지 못할 해였다. 그의 간절한 소망과 달리 아들을 잃었다."
“그의 그림에는 새가 그려져 있다. 새는 영성을 상징한다. 비둘기는 평화를, 독수리는 용맹을 상징한다. 그는 새를 몰고 오기도 하지만 새를 쫓아가기도 했다...잡을 수도 없고 잡히지도 않는 새. 날개를 펴 비상하기도 하는 새. 오래 쳐다보다 닮아 버렸다."
작가와의 일문일답...“그림은 늙지 않는 존재"
책이 서점에 모습을 드러낸 날 필자는 안병호 작가를 만났다. 그와 나눈 대화를 소개한다.
-소설을 쓰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특별한 동기는 없습니다.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이랄까요? 제가 그림을 좋아하니까요. 굳이 동기를 든다면 그것뿐입니다."
-언제부터 구상했던 스토리이며 한대희 검사를 주인공으로 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30년 전부터 줄곧 구상했던 스토리입니다. 천경자의 미인도 등 그간에 일어났던 위작 사건들을 보면서 검사의 입장에서 썼습니다."
-이 소설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하려는 메시지가 있나요?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짚어 본 것입니다. 선(善)과 악(惡)을 논하자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일면을 들여다 본 것입니다. 판단은 독자의 몫입니다."
-안 작가님은 그림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소설에도 썼습니다만, 대부분의 화가들은 처음에는 사실화를 그리기 시작하는데 각자가 다가가는 종착역은 모두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새만 그리던 화가도 있고, 소만 그리는 화가도 있습니다. 화가마다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대상이 다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대상이 변합니다. 그러면서 화가도 늙고 병(病)이 듭니다. 그러나 그가 그린 그림은 늙지 않고 그대로 존재하잖아요. 그래서 그림은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속여서 가짜를 유통시키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일본 도쿄의 수이하(翠波) 화랑 관계자의 말이다.
“저희 화랑은 연간 1400점 정도의 그림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약 30%는 화가와 직접 거래를 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70%인 1000여 점의 작품은 해외 화랑이나 경매, 개인 고객으로부터 구입합니다. 이러한 구매에 있어서 진위(眞僞) 판별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날마다 위조품과 싸우는 셈이지요. 그림을 사랑하는 고객을 위해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