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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럼

따뜻한 기술이 세상을 구원한다

참 인간적인 발명품, 자전거 세탁기 & 생명의 빨대

글  이인식 지식융합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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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르완다 어린이들이 OLPC 재단이 무상 보급한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다 [사진 OLPCNEWS] 선진국의 정보기술 독점을 앞장서 쟁점화한 미국의 과학자는 매사추세츠 공대(MIT)의 컴퓨터과학연구소를 23년 동안 이끈 마이클 더투조스이다. 1999년 더투조스는 전화기나 자동차처럼 누구나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를 개발하는 옥시전 프로젝트(Oxygen project)를 추진했다. 옥시전은 산소를 뜻한다. 더투조스는 우리가 마시는 산소처럼 옥시전 시스템이 널리 퍼져 누구나 컴퓨터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꾼 것이다.

 
1999년 세계 인구는 60억 명을 돌파했지만 통신망에 연결된 컴퓨터는 약 1억 대에 불과했다. 세계 인구의 1.7%를 밑도는 수치이다. 정보기술이 부자 나라에 의해 독점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통계이다. 선진국은 정보기술을 활용하여 갈수록 부자가 되지만 후진국은 속수무책이었다. 이러한 디지털 양극화(digital divide) 상태가 지속되면 인류의 공존공영은 기대할 수 없다. 더투조스는 옥시전이 전 인류를 대상으로 개발될 것임을 천명하고 선진국의 정보기술 독점에서 비롯되는 폐해가 옥시전으로 해결되기를 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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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기술은 한마디로 사람의 눈높이에 맞추어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사회적 기술이다.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혜택을 받지 못하는 아동·여성·노인·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 농어촌 주민·저소득층·다문화가정 같은 소외 계층, 희귀병 환자처럼 고통 받는 사람들, 궁핍한 생활을 하는 북한 동포와 제3세계 주민이 따뜻한 기술의 수혜 대상으로 분류될 수 있다.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 2001년 더투조스는 옥시전 프로젝트의 개념과 의의를 소개한 저서인 『미완의 혁명(The Unfinished Revolution)』을 펴냈다. 그는 오늘날처럼 사람이 컴퓨터의 기능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옥시전 프로젝트처럼 컴퓨터를 사람의 능력에 맞추는 ‘사람 중심의 컴퓨터(human-centered computer)’가 개발되지 않으면 정보기술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기 때문에 정보혁명은 미완의 상태라고 강조하였다. 더투조스는 이 책을 펴내고 얼마 뒤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64세.
  
한 발 앞서간 더투조스·네그로폰테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의 디지털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선 또 다른 과학자는 MIT 미디어연구소의 설립자인 니컬러스 네그로폰테이다. 2005년 네그로폰테는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들에게 컴퓨터를 공짜로 나누어주기 위해 오엘피시(OLPC) 재단을 설립했다. OLPC는 ‘One Laptop Per Child(어린이 한 명에게 랩톱컴퓨터 한 대씩)’의 약자이다. 오엘피시 재단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작동하는 100달러짜리 컴퓨터를 대량 생산하여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아이티처럼 전쟁이나 재난을 겪은 나라를 포함해서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의 개발도상국 어린이들에게 공짜로 제공했다. 2011년 말까지 300만 대 가량의 컴퓨터가 40여 개 지역의 어린이에게 25개 언어로 무상 보급되었다. 후진국의 어린이들이 이 컴퓨터로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으므로 선진국과의 디지털 격차를 좁히는 데 보탬이 될 것 같다.
  
간디는 손수 물레를 돌려 옷을 만들어 입었다. 더투조스와 네그로폰테는 기술과 휴머니즘(인본주의)의 융합을 통해 기술 발전의 열매가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골고루 제공되는 방안을 모색했다고 평가될 수 있다. 이를테면 정보기술이 인본주의와 융합하여 인류의 삶을 윤택하게 해 주는 이른바 ‘따뜻한 기술(friendly technology)’이 되기를 소망했다고 볼 수 있다.
 
따뜻한 기술은 한마디로 사람의 눈높이에 맞추어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사회적 기술이다.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혜택을 받지 못하는 아동·여성·노인·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 농어촌 주민·저소득층·다문화가정 같은 소외 계층, 희귀병 환자처럼 고통 받는 사람들, 궁핍한 생활을 하는 북한 동포와 제3세계 주민이 따뜻한 기술의 수혜 대상으로 분류될 수 있다.
 
제3세계에 보급된 따뜻한 기술의 상징적 사례로는 영국 회사인 프리플레이 에너지(Freeplay Energy)의 라디오를 꼽을 수 있다. 1994년 설립된 이 회사는 전지 대신 크랭크로 전력이 공급되는 휴대용 전자 제품을 판매한다. 골동품 가게에서 가끔 제트(Z) 자 꼴로 굽은 크랭크를 돌려 시동을 거는 축음기를 볼 수 있다. 초기의 자동차도 물론 크랭크로 발동을 걸었다. 그러나 오늘날 장난감조차 태엽 장치로 움직이는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1991년 영국의 한 발명가는 전력 공급도 원활하지 못하고 전지를 살 돈도 없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 크랭크로 전기를 조달하는 라디오를 고안했다. 원리는 단순하다. 크랭크로 강철 스프링을 뚤뚤 감는다. 스프링이 풀리면서 전동장치(기어)가 발전기를 구동하면 라디오에 동력을 공급하는 전기가 발생한다. 이 라디오를 제작하는 프리플레이는 아프리카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수천 대를 기증하여 에이즈 퇴치 방법, 일기 예보, 이산가족 찾기, 지뢰 매설 위치에 관한 정규 방송을 들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사람의 손으로 전류를 발생시키는 참으로 원시적인 기술이 참으로 원시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구원의 손길을 내민 친구가 되어 준 셈이다.
 
프리플레이의 라디오는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의 한 가지 사례이다. 적정기술은 "현지에서 구한 재료로 소규모의 사람들이 생산할 수 있으며, 누구나 쉽게 배워서 사용할 수 있고, 에너지가 많이 필요하지 않은 환경 친화적인 기술"이라고 정의된다.
 
적정기술의 원조는 인도의 민족주의 지도자인 마하트마 간디(1869~1948)이다. 간디는 스스로 물레를 돌려 옷을 만들어 입을 정도로 소규모의 전통 기술을 중요하게 여겼다. 인도를 식민 통치하던 영국은 직물을 대량생산하는 기술을 들여왔다. 이런 상황에서 간디는 영국의 대량생산 기술이 대다수 민중을 희생하여 소수에게만 특혜를 주게 되므로 인도 사람은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마을 중심의 전통 기술이 지역 경제의 자급자족에 필수적임을 설파하는 사회 운동을 펼쳐 적정기술의 씨앗을 뿌린 최초의 인물로 역사에 기록된다.
 
간디에 이어 적정기술의 이론을 처음으로 확립한 독일 출신의 영국 경제학자인 에른스트 슈마허(1911~1977)는 적정기술의 아버지라 불린다. 1973년 그가 펴낸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는 1970~80년대에 적정기술 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전개되게끔 촉매 역할을 톡톡히 했다.
 
제3세계 국가의 주민들을 위해 개발된 적정기술은 의식주는 물론 보건, 교통, 통신 분야에까지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다. 예컨대 MIT에서는 전기 대신 인력으로 돌아가는 세탁기인 바이슬아바도라(bicilavadora), 곧 ‘자전거 세탁기’를 개발했다. 이 세탁기는 드럼통이 자전거 바퀴 안에 들어가 있어 어린이도 발로 페달을 밟아서 돌릴 수 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오지 마을 여인네들은 발로는 페달을 밟아서 바이슬아바도라를 돌려 빨래를 하고 동시에 손으로는 뜨개질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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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의 사회적 기업이 개발한 개인용 정수기인 라이프스트로(LifeStraw), 곧 ‘생명의 빨대’는 식수를 확보하기 어려운 지역의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라이프스트로를 이용해 강물을 마시고 있는 아프리카 주민들. 사진=The Survival Outpost
적정기술의 아버지, 에른스트 슈마허
 
스위스의 사회적 기업이 개발한 개인용 정수기인 라이프스트로(LifeStraw), 곧 ‘생명의 빨대’는 식수를 확보하기 어려운 지역의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 이름 그대로 빨대처럼 생긴 이 장치에 입을 대고 더러운 물을 빨아 마시면 세균, 바이러스, 기생충 따위가 99.9%까지 걸러진다. 길이 31㎝에 지름 30㎜인 원통형의 빨대 통 안에 정수 여과 장치가 들어 있어 빨대 하나로 1,000L의 물을 정화할 수 있다. 이는 한 사람이 일년 동안 마실 물의 양에 해당한다. 라이프스트로는 가격이 비싸 가난한 사람들이 구입하기에는 부담스러워 국제적인 자선단체들이 무상으로 오지나 재난 지역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다.
 
라이프스트로는 2007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Design for the Other 90%)’ 전시회의 포스터에 등장해서 더욱 유명해졌다. 이 전시회를 계기로 그동안 산업 디자인의 혜택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고 여겨지는 90%의 소외계층을 위한 작품 활동이 요구된다는 문화 운동이 전개되었다. 또한 20세기 말에 열기가 사그라졌던 적정기술에 대한 관심도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사회 공헌 디자인 또는 나눔 디자인이라고 불리는 이른바 ‘착한 디자인’ 운동이 제3 세계 사람들을 위한 적정기술 작품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가령 아프리카에서 초음파를 발생시켜 모기를 퇴치하는 장치나 인도에서 연탄가스 중독을 줄이기 위해 재래식 아궁이를 개선한 조리 기구는 착한 디자인이 적정기술의 다른 이름임을 보여준다.
 
착한 디자인 운동이 세계적 추세가 됨에 따라 국내 디자인 전문가들도 이런 흐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국제적 권위를 지닌 디자인상을 여러 차례 수상하기도 했다. 이런 의미에서 따뜻한 기술은 착한 디자인 운동을 통해 벌써 우리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하지만 따뜻한 기술은 아직 정책 연구 단계에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지난 8월 한국공학한림원이 차기 정부가 중점적으로 추진해야 할 정책 과제를 도출하기 위해 마련한 정책 총서인 ‘대한민국의 새로운 50년, 과학기술로 연다’에서 따뜻한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언급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왜냐하면 2013년 체제의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은 복지사회 구현을 위해 과학기술이 감당해야 할 역할이 중차대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이 한국 사회의 보편적 복지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과학기술의 수혜 측면에서 불평등 또는 양극화 문제를 해소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를테면 따뜻한 기술이 정부 차원에서 육성되어 고령자와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의 일자리를 창출하여 따뜻한 사회가 실현됨과 아울러, 개발도상국의 사회문제 해결에 필요한 기술혁신을 촉진하는 공적개발원조(ODA) 사업도 추진하여 대한민국의 국격이 제고되어야 할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따뜻한 기술과 착한 디자인에 대한 한국 사회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10월 초에 국내 전문가 23명이 함께 펴낸 책에서 이런 대목이 눈길을 끈다.
 
"따뜻한 기술의 목표는 단순히 복지의 실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기술 개발과 적용 그 모두가 사람 중심이 되는 지속 가능한 기술혁신을 통해 인간과 자연이 우선시되는 사회혁신을 이루고, 이를 토대로 지역 순환 경제를 활성화시켜 고용과 소득 창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하는 데 더 큰 목표가 있다."(임성진 전주대 교수) 출처=중앙선데이 ‘이인식의 과학은 살아있다’ 2012년 10월 21일자
 
 

 

[입력 : 2020-02-05]   이인식 지식융합연구소장 more 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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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식 지식융합연구소장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했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위원, KAIST 겸직교수, 문화창조아카데미 총감독 등을 지냈다. 대한민국 과학칼럼니스트 1호로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선데이, 매일경제 등 국내 주요언론은 물론 일본 산업기술종합연구소 발행 월간지 PEN에 칼럼을 연재하며 국제적 과학칼럼니스트로 인정받았다. '2035미래기술 미래사회' '융합하면 미래가 보인다' '미래교양사전' 등 수십권의 책을 출간했다. 제1회 한국공학한림원 해동상, 한국출판문화상, 서울대 자랑스런 전자동문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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