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1. 칼럼
  2. 김재홍의 길을 찾는 여행

울릉도라는 섬

“때를 잃어버린, 혹은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여름”

글  김재홍 기자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네이버 블로그
  • sns 공유
    • 메일보내기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그를 만나러 가는 날이 정해진 건 뜻밖이었다. 이미 두 번이나 미루었을 정도로 쉽지 않은 터였다. 마음은 있어도 선뜻 결행하기 어려웠던 것은 무엇보다 그곳이 육지에서는 아주 먼 탓이지만, 그저 편안히 다녀오기엔 주변 정리가 되지 않은 까닭도 있었다. 친구를 만나 무언가 힘을 주려면 우선 자신의 마음부터 단속할 필요가 있었다. 또 원격지에서 근무하는 현역 군인을 위문하는 데에는 정다운 친우가 많을수록 좋겠기 때문이었다.

  

사실 지난 초봄에 가려던 계획은 무모하기도 했다. 이십 년이 넘는 조직 생활을 정리하는 데 겨우 두 달은 너무 짧았다. 회사와의 사무적인 뒷정리는 생각보다 길었다. 그럼에도 만나러 가기로 작정했던 것은 그 또한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한 상실감 속에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나 나나 어쩌면 실패자로서 서로를 위로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관계 기관에 이런저런 서류를 제출해야 하는 것은 물론 몇몇은 들락날락해야 하는 데다 심리적으로도 변화된 상황에 적응하는 데에는 역시 시간이 더 필요했다.

  

지난 5월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동반자를 구하지 못했다.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특별한 근무지에서 일하는 친구를 위해서라면 좀 왁자해도 좋을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서로들 가까이 지내는 친구들의 일정을 확인했으나 대부분 어렵다는 답을 주었다. 어린이날에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까지 하필이면 5월에는 기념일도 많고 챙길 것도 많은 탓이었다. 그렇다고 한일 관계로나 남북문제로나 아무래도 예민한 곳인 울릉도에 근무하는 친구를 달랑 혼자 찾아가기에는 어딘가 적절하지 않은 듯했다. 그랬다가는 위문은커녕 위로를 받고 나오게 될지도 몰랐다.

  

그런데 뜻밖에도 두 선배의 응답이 왔다. 한 선배는 동향(同鄕)으로 이미 여러 차례 만나고 어울린 탓에 격의 없이 지낼 수 있는 터수였고, 다른 한 선배도 말주변으로나 인물됨으로나 어울려 얼마든지 즐거운 자리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부부가 동행할 수 있다는 강점이 특별했다. 원격지의 ‘현역’ 친구도 아이들이 대학과 군에 입대한 탓에 부부만 지내는 터라 모두 네 쌍이 모여 어울린다면 왁자하니 위문이 될 것이었다. 그렇게 기대하지 않았던 두 선배의 동참으로 그를 만나러 가는 날이 정해졌다.

  

하지만 의논 끝에 정한 날짜는 온 나라가 휴가를 떠난다는 한여름의 사흘간이었다. 산업화 이후 제조업 중심의 국가경제는 근로자들을 한날한시에 생산 라인을 멈추고 휴가를 떠나게 만들었다. 경포대해수욕장은 물론 강릉항여객터미널과 울릉도 저동항여객터미널도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호텔도 모텔도 뱃삯도 성수기 가격이요, 음식도 물도 바람도 공기도 햇볕에도 휴가철 관광지 프리미엄이 붙어 있었다. 왁자한 위문을 상상한 울릉도행은 항구에서부터 실현되고 있었다.

  

강릉항에서 저동항까지 세 시간이 넘는 쾌속의 항해 끝에 도착하자마자 점심을 먹었다. 서울의 밥값을 훨씬 능가하는 비싼 홍합밥과 한치물회는 역시 가성비가 나빴지만, ‘관광 울릉도’의 활기와 초행(初行)의 신선한 기분 탓에 그럭저럭 맛나게들 먹었다. 식사 후 저동항 인근 바닷가로 나가 화산 폭발로 형성된 울릉도의 기괴한 해안선을 보며 저마다 사진을 찍었다. 실은 두 선배 가운데 한 분의 부인이 갑작스런 일로 합류하지 못해 다소 분위기가 어색할 수 있었으나 모두들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들 사진을 찍어 주며 즐거운 분위기로 이끌어 갔다.

  

그것은 암묵적인 합의 같은 것이었다. 때를 잃어버린, 혹은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의 무언의 합의는 서로를 위해 서로를 배려하고 응원하는 것이었다. 울릉도행은 무엇보다 원격지 ‘현역’을 위한 위문이어야 하지만 우선은 육지에서 먼 길을 나선 선후배들 서로가 힘을 주어 함께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기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저동항 해변에서의 사진 촬영은 단지 외양을 찍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응어리진 체증을 솎아내는 일종의 치유 과정이었는지 모른다.

  

연이어 관광버스를 탔다. 역사학과 지리학과 지구과학과 국제관계학을 통달한 초로의 기사는 그의 말 그대로 ‘석사, 박사 위에 기사’인 사람이었다. 울릉도의 풍광과 바다와 자연과 사람들의 내력과 일상을 특별하게 조명할 줄 아는 빛나는 말재주였다. 새벽에 육지를 출발한 고단한 몸들은 비록 졸다 깨다 졸았지만 그를 통해 짧은 시간 동안 울릉도를 매우 정든 고장으로 느낄 수 있었다. 다소 일방적인 그의 정치외교학과 민족지학만 제외한다면 누대에 걸쳐 전승되어야 할 인간문화재급 기사라고 단언할 수 있다.

  

예상은 했지만 위문보다는 여행에 가까운 첫날이었다. 다저녁이 되어서야 그를 만날 수 있었다. 평일에 ‘현역’을 만나기란 역시 쉽지 않았다. 저녁때도 한참 지나서야 사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친구를 잠깐 만나 그간의 생활과 근황을 물어볼 수 있었다. ‘이미 적응을 했고, 이제는 다 잘 지내고 있다.’는 시원시원한 대답과 함께 반주 몇 잔을 들고 건배를 외쳤다. 깊은 대화를 나누기엔 시간도 부족했고 관광 성수기를 맞은 항구 한 편의 소란스런 식당은 장소로도 적절하지 않았다.

  

게다가 오랫동안 독도를 두고 긴장을 유발해 온 일본은 전례 없이 경제 문제까지 촉발했고, 중국과 러시아 군용기는 동해 상공을 자신들의 작전구역으로 생각하듯 거리낌 없이 비행했으니 퇴근 시간 이후라고 그가 마음 편히 우리를 만날 형편도 아니었다. 긴장하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7개월만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건배를 외칠 수 있었던 것으로 위안을 삼는 수밖에 없었다. 비록 위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일방에게만 유익한 만남도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를 응원하기 위해 만났기 때문이다.

  

이튿날은 섬을 일주하는 관광선을 탔다. 파도를 가르며 물살을 튀기는 항해 속에서 울릉도는 그 높푸른 산세와 더불어 어쩔 수 없이 외로운 섬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탓도 있겠지만 인근에 다른 섬들도 없이 짙푸른 바다 위에 우뚝 솟은 화산섬은 그 가파른 각도만으로도 외로울 터다. 파도를 타고 넘는 율동감 넘치는 해상 관광은 있는 힘을 다해 배를 따라오는 갈매기들의 새까만 주둥이에 새우깡을 던져주는 재미를 보태었으나, 아무래도 ‘인간문화재급 말재주’를 따라갈 수는 없었다.

  

울릉도를 떠나던 날은 ‘현역’이 마련해 준 사제 승용차를 타고 몇 곳을 더 둘러볼 수 있었다. 봉래폭포니 관음도니 하는 명소도 물론 좋았지만 안용복기념관과 독도의용수비대기념관 방문은 뜻깊었다. 구불구불한 비좁은 도로를 어렵사리 한참 동안 올라가야 해서 추천이 없었다면 관람하기 쉽지 않아 보였다. 높은 곳에서 바다를 조망하기 위한 것이든 어떻든 우리 강토의 동쪽 끝을 지켜 낸 안용복(安龍福. 1658?-?)과 의용수비대의 외로운 싸움을 기리기 위해서는 큐레이션(curation)과 접근 도로 확장 등 아직 몇 가지 보완이 필요해 보였다.

  

우리의 울릉도 방문은 역시 위문보다는 위안이었다. 울릉(鬱陵)의 자연과 역사와 일상만이 ‘때를 잃어버린, 혹은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서로 정성을 다했다. 서로를 향한 너나 없는 정성이 우리의 위안이었다. 또 국토의 동쪽 끝자락에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진짜 현역’은 그 존재만으로도 위안이었다. 위문이 일방향의 위로라면, 위안은 서로를 향한 양방향의 위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위로할 일이다.

  

  

  

[입력 : 2019-08-03]   김재홍 기자 more article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네이버 블로그
  • sns 공유
    • 메일보내기
Copyright ⓒ 서울스트리트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독자댓글
스팸방지 [필수입력] 왼쪽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포토뉴스

Future Society & Special Section

  • 미래희망전략
  • 핫뉴스브리핑
  • 생명이 미래다
  • 정책정보뉴스
  • 지역이 희망이다
  • 미래환경전략
  • 클릭 한 컷
  • 경제산업전략
  • 한반도정세
뉴시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