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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장상인의 일본탐구

커피와 선교사, 그리고 새남터

종교탄압은 칼(刀)로는 불가능

글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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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뇌 주교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사진=위키백과

<일본을 통일하려는 야망이 부풀었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는 1569년 4월 16일 봄날, 인부들이 성(城)을 쌓는 공사현장에서 포르투갈 선교사를 맞는다.....포르투갈의 선교사인 프로이스(Luis Frois, 1532-1597)는 이 자리에서 노부나가(信長)에게 유리병에든 별사탕과 양초를 선물한다. 그리고, 원하던 대로 기독교 포교를 허락받는다.>


한양대 일어일문학과 정하미 교수가 쓴 <일본의 서양문화 수용사>에 담긴 별사탕에 대한 내용이다. 저자는 실크로드(Silk Road)와는 다르게 포르투갈은 스스로 개척한 종교 전파의 길을 일명 ‘별사탕 로드’라고 했다.


이처럼 별사탕을 포함한 서양의 과자들은 일본에서 기독교의 포교 수단으로 유용하게 사용됐다. 그리고, 이는 일본의 생활혁명을 가져오기도 했다. 서구(西歐)의 생활필수품이 일본에 전달된 것이다.


우리가 즐겨 마시는 커피-조선에의 커피 유입이 선교활동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별사탕’ 못지않게 흥미롭다.


조선 최초의 커피 유입은 ‘베르뇌’ 주교에 의해


<베르뇌(Berneux) 주교는 첫 주문을 한지 1년 6개월 후, 커피를 받아본 지 5개월 후인 1861년 9월 30일에도 포도주·코냑·설탕과 함께 커피 50리브르(약 22.5kg)를 구입하여 보내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2년 후인 1863년 11월 24일에도 커피 50카티스(Catis, 박스)와 설탕 50카티스, 1865년 12월 4일 커피와 설탕 각 100리브르(약 45kg)를 요청했다...주변의 조선인들 중에 선교사로부터 커피를 받아 마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없었고, 커피가 조선에서의 선교활동에 직접 도움이 되지 않았다면 요청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인 이길상(65) 박사의 저서 <커피 세계사+한국 가배사>에 쓰인(187쪽) 내용이다. 커피는 이렇게 선교사들에 의해서 조선으로 유입됐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후일 한강변 새남터에서 처형당했다.


파리 외방천교회는 <조선 천주교 그 기원과 발전>(김승옥 옮김)을 통해서 당시의 상황을 자세하게 알렸다. 파리 외방전교회(Missions etrangeres de Paris, MEP)는 1658년 설립된 가톨릭교회의 선교단체이다. 책의 내용이다.


<1866년 3월8일. 주교와 선교사들은 옥에서 끌려 나와 형장으로 향하였다. 그들이 가는 곳은 한강변 새남터였다. 그들은 망나니(?子手)의 칼에 목이 달아났다. 베르뇌 주교는 52세였고, 그의 뒤를 따른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신부는 28세, 볼리외(Beaulieu) 신부는 28세, 도리(Dorie) 신부는 27세였다. 같은 날 승지 남종삼이 친구 홍봉주와 함께 처형당했다.>


베르뇌 주교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베르뇌(Simeon Francois Berneux, 1814-1866) 주교

 

그는 조선 제4대 대목구장이었다. 1840년 프랑스를 떠나 베트남의 통킹(Ton King)에서 선교활동 중 붙잡혀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파뱅 레베크(Favin Leveque) 함장의 도움으로 만주로 갔다. 거기에서 11년 동안 선교를 하다가 1856년 배를 타고 조선에 입국했던 것이다(위키백과).


새남터는 어떤 곳인가?


한양성 밖 강변에 위치한 새남터는 일명 ‘노들’ 또는 ‘사남기’라고 불리던 곳이다. 필자는 추석 연휴를 맞아 오래 전부터 궁금했던 새남터를 찾았다. 내비게이터의 지시(?)대로 강북강변 이촌동 아파트촌을 몇 바퀴 돌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차를 아파트 주차장에 세우고 한 주민에게 물었다.


“저쪽으로 200m쯤 가시면 큰 기와집이 나올 것입니다. 거기가 새남터 성당입니다."


주민이 알려준 대로 걸어가자 커다란 건물이 나타났다. 한옥 지붕 위에 3층탑처럼 보이는 조형물이 있었고, 하늘을 향한 십자가도 있었다. 정면에 ‘새남터’라는 큰 글씨와 그 아래 붉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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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성지 새남터

“이곳은 새남터 형장입니다."


이제는 한강변이 아닌 아파트촌으로 변한 처형장 새남터-입구에 쓰여 있는 <새남터 순교 성지>의 안내문을 그대로 옮겨본다.


<한양성 밖 남쪽 한강변에 있는 새남터는 조선 초기부터 군사들의 연무장이자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처형장이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시작으로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이 시작되었고, 그 이후 박해가 있을 때마다 주교와 신부, 평신도 지도자들이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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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 동상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순교지가 바로 이곳 새남터이다. 기해박해 때에는 앵베르(범) 주교와 모방(나) 신부, 샤스탕(정) 신부 등 세 성직자가 순교하였다. 병오박해 때는 김대건 신부 외에 현석문 회장이, 병인박해 때는 베르뇌 주교와 브르트니에르 신부, 볼리외 신부, 도리 신부,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 등 다섯 명의 신부와 평신도인 정의배 마르코, 우세영 알렉시오 등 두 사람의 평신도가 순교하였다.>


<새남터 성당은 한국순교복자수도회에서 용산구 서부 이촌동199 땅을 매입하고 서울대교구에서 1950년 순교 기념지로 지정하였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주 건물과 목조 3층탑 형식의 종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987년 9월 1일 축성식을 가졌다.>


외방천교회의 기록 <조선 천주교 그 기원과 발전>에 실린 내용과 일치했다.


“삶은 순교입니다. 순교는 사랑입니다."

  

성당의 오른편에는 김대건(1821-1846) 신부의 동상이, 왼편에는 한국 최초의 외국인 신부 주문모 야고보(周文謨, 1752-1801)의 흉상이 있었다. 주문모 신부는 베이징 신학교를 졸업하고 1795년 조선에 들어왔다. 탄압을 피해 서울에서 숨어 지내며 전교 활동을 폈다. 정약종, 황사영 등을 만났고 왕실 여인들에게도 세례를 베풀었다.


성당의 건물 내부로 들어서자 열(熱)과 QR코드 체크를 했다. 때마침 예배 중이어서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었다. 입구에서 담당 직원에게 참고가 될 만한 자료를 부탁했다. 기다리는 동안 전시된 모형을 만났다. 한강변 모래밭에서 형(刑)을 집행하는 장면이었다. 이무영(57)의 장편소설 <새남터>의 한 대목과 오버랩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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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새남터 처형장의 모형

 

<평소보다 바람이 조금 강하게 부는 탓에 청·홍·황 삼색의 깃발들이 더욱 신나게 춤을 춰댔다. 새남터.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목이 여기서 잘려나갔다...이곳에서 목이 잘린 천주교도들은 수없이 많았다...조정은 칼로서 천주학쟁이들을 누르려 했으나 오히려 믿는 자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천주학은 피를 흘리면 흘릴수록 더욱 강해진다는 사실을 이미 역사가 입증하고 있었다.>


아무리 강한 권력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종교탄압(宗敎彈壓)은 칼(刀)로서 해결되지 않는다. 이는 종교뿐이겠는가. 정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입력 : 2021-09-23]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more 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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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30년 넘게 현해탄을 넘나들며 일본인들과 교류하고 있는 홍보컨설팅회사 JSI파트너스의 대표다. 일본비즈니스 전문가로도 정평이 나있다. 동국대를 졸업하고 육군 제2훈련소 교관(ROTC11기)으로 군(軍) 복무했다. 직장생활의 대부분을 대우에서 보냈다. 대우건설 재직시절 철옹성 일본 건설시장의 문을 열었다. 대우건설 문화홍보실장(상무)에 이어 팬택계열 기획홍보실장(전무)을 역임했다. 2008년부터 지금의 JSI 파트너스 대표이사로 있다. 일본의 정계·관계·업계·언론계 등 두터운 인맥을 갖고 있다. 한편 비즈니스를 하면서도 칼럼니스트로 여러 매체에 일본 관련 글을 쓰고 있다. 특히 일본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면서 현장을 직접 보고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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