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도자기·조각품 등 위작(僞作) 예술품에 이어서 요즈음 실시간으로 벌어지고 있는 정치권의 ‘거짓말’ 논쟁이 코로나19보다도 더 국민들을 열 받게 한다. 왜들 이러는 것일까. 동네 공원 숲길을 걷고 나서 돌아오는 길에 서점에 들렀다. ‘발레리 트루에 (Valerie Trouet)’의 <신간 나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조은영 譯)라는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집어 들었다.
‘발레리 트루에’는 세계적인 연륜연대학자로 미국 애리조나대학교 나이테 연구소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연륜연대학이란 나무의 나이테를 분석해 연대를 측정하고 이를 활용하여 과거 기후와 생태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저자는 20여 년간 외딴 아프리카 마을에서부터 아메리카, 유럽, 러시아의 오지까지 전 세계 곳곳을 누비며 나무와 나이테를 연구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지난 2000년 동안 지구 날씨가 어떻게 변화했으며 이것이 인류 문명과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밝히고자 노력해 왔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본다.
220억 원짜리 전설적인 바이올린의 진품 논란
1939년,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의 애슈몰린 박물관은 런던의 유명한 악기 제작자이자 수집가 집안인 힐 가문으로부터 전설적인 바이올린 ‘메시아’를 기증받았다. 이 악기는 세계적인 장인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Antonnio Stradivari)가 만든 것으로 현존하는 가장 비싼 악기 중 하나다. 가격은 한화 225억 원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과거에 ‘힐’ 가문은 자동차 거물 헨리 포드의 백지 수표도 거절할 정도로 이 바이올린을 소중하게 보관해 왔다.
그러던 1999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악기 보존 전문가 ‘스튜어트 폴렌스’는 메시아가 위작일 수도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스트라디바리는 1716년에 메시아를 제작했고 1737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메시아는 여러 수집가의 손을 떠돌다가 1855년에 파리의 무역상 장 바티스트 비욤에게 넘어갔는데, 비욤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올린 장인이자 복제품 제작자였던 것이다. 폴렌스는 이때 메시아가 복제되었고 그 가품이 결국 애슈몰린 박물관에까지 도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폴렌스’와 ‘힐’ 가문은 이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각각 연륜연대학자에게 메시아의 제작 연도를 의뢰했다.
<이 의문에 답하기 위해 연륜연대학(Dendrochronology, 나이테에 생장 연도를 부여하고 나이테에 저장된 다양한 환경 정보를 밝히는 학문)이 동원되었다. 연륜연대학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나무’라는 뜻의 ‘Dendros’, ‘시간’이라는 뜻의 ‘Chronos’에서 유래했다. 메시아를 제작한 목재의 나이테 폭을 측정하면 바이올린의 제작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즉, ‘메시아를 만든 나무가 언제 숲에서 베어졌는지 알 수 있다’는 말이다. 만약 가장 최근으로 보이는 나이테가 1737년 이후에 생성되었다면, 그 나무는 스트라디바리가 사망한 뒤에도 멀쩡히 생장하고 있었다는 뜻이므로 그가 이 바이올린을 만들었을 리 없다. 반대로 가장 최근 나이테가 스트라디바리가 메시아를 제작한 1716년을 앞선다면...이 바이올린은 진품임이 입증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이테를 사용한 연대 측정은 논란의 불길에 기름을 부었다. 무엇 때문일까.
<폴렌스가 고용한 연륜연대학자들은 측정할 수 있는 나이테 중 가장 최근 것이 1738년을 가리킨다고 했다. 그것은 스트라디바리가 죽고 나서 1년 뒤에도 나무가 여전히 숲속에 뿌리를 내린 채 자라고 있었다는 뜻이다. 한편, 힐 가문이 의뢰한 연륜연대학자들은 가장 최근 나이테가 1680년대에 생성되었다고 추정했다. 즉, 메시아의 제작 연도로 기록된 1716년을 앞서므로 메시아가 진품이라는 뜻이다.>
결국, 메시아의 진품 논란은 2016년, 영국의 연륜연대학자인 피터 랫클리프가 마침표를 찍었다.
<1724년에 제작된 스트라디바리의 또 다른 바이올린 ‘엑스-빌헬미’와 ‘메시아’의 나이테 패턴을 비교한 결과 둘의 나이테가 정확하게 일치한 것이다. 즉 ‘메시아’와 ‘엑스-빌헬미’는 같은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었고, 메시아도 진품으로 확인되었다.>
세상의 모든 나무에게는 각자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발레리 트루에’는 1999년 봄, 석사 학위를 준비할 때에만 해도 나이테가 과학의 한 분야가 될 정도로 거기에 많은 정보가 담겨 있는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의 말이다.
“내가 나이테에 꽂히게 된 것은 석사 학위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안 실험실에서 나이테를 분석하면서였다. 탄자니아에서 직접 수집한 나무 시료들을 현미경으로 본 것이 결정적이었다. 나무들은 정말 근사했고, 나무들 간에 일치하는 나이테 패턴을 찾는 일은 퍼즐을 푸는 것 같은 중독성이 있었다. 나는 나이테가 보여 주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다. 박사 과정에 진학했을 때 나이테 연구를 4년간 더 할 수 있는 기회 앞에서 나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스물다섯의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사무실에 매여 지내는 40년간의 공무원 생활이냐? 아니면 과학자가 되어 아프리카로 떠나 돈을 받으면서 나이테 퍼즐을 푸느냐?였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이후 ‘발레리’는 오래된 나무를 찾아 아프리카의 외딴 마을, 아메리카의 사막, 유럽의 오래된 숲, 시베리아의 오지, 몽골의 용암 지대 등 세계 곳곳을 누비며 연구를 이어 갔다. 그 과정에서 나이테를 이용해 캘리포니아 산불의 역사를 되짚기도 하고 가뭄, 허리케인, 제트기류 등 극한 날씨와 기후의 움직임도 추적했다. 또한 스위스산소나무의 나이테를 이용해 지난 수 세기의 기후를 재구성하기도 했다. 2016년에는 그리스의 핀두스산맥에서 1075살 먹은 ‘아도니스’라는 이름의 나무를 발견했는데, 아도니스는 현재까지 유럽에서 발견된 살아 있는 최고령 나무로 인정받고 있다.
나무는 한 해 한 해 성실하게 나이테를 만들고 거기에 역사와 날씨를 기록한다. 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 나이테가 공유하는 정보를 제대로 해석하려면 ‘연륜연대학’이라는 도구가 반드시 필요하다. 연륜연대학이란 나이테를 분석해 연대를 측정하고 이를 활용해 과거 기후와 상태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 책의 저자이자 세계적인 연륜연대학자 발레리 트루에는 나이테가 과학의 한 분야가 될 정도로 거기에 많은 정보가 담겨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이테를 세다 보면 과학, 역사, 지리, 기후, 건축, 문학, 미술 등 다양한 분야와 장르를 넘나드는 지적 탐험에 발을 들이게 된다. 나이테와 태양의 흑점과 해적선처럼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존재들의 상관관계도 알 수 있고, 로마 제국과 몽골 제국의 흥망성쇠에 기후가 미친 영향도 살펴볼 수 있다. 결국 나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기후 변화의 원인과 거대한 흐름도 파악할 수 있다. 이 책은 연륜연대학을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국내 최초의 과학 교양서이자 한 여성 나이테 과학자의 경이로운 탐구 일지인 셈이다.
우리 인간에게도 ‘연륜연대학’이라는 도구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의 살아온 궤적이 모두 남이 있을 테니까. 마침 어떤 지인의 말이 떠올랐다.
“모든 대선 주자들은 초·중·고교 시절의 학교 생활기록부를 공개해야 합니다"라는.
이 또한 그 사람의 중요한 나이테일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