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시(詩)에서 감각을 통해 실재하는 것과 실재하지 않는 것, 참된 것과 거짓된 것, 사실적인 것과 환영적인 것을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다. 불가능의 차원이다. 참이거나 거짓인 것은 사고이며, 우리가 감각에 대해 참되게 혹은 거짓되게 사고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감각은 사실적인 것과 환영적인 것으로 구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감각에 대해 사고한다는 것은 감각을 해석한다는 것이며, 그것은 감각이 다른 감각과 갖는 관계를 맺으며 사실적 질감을 구축한다는 의미이다. 시에서 발현되고 표현되는 사실적 감각은 시적 주체에 의해 올바르게 해석된 감각이며, 상상적 감각이란 아직 해석되지 않은 새로운 감각을 의미한다.
이때 상상적 감각은 일반 독자들이 해석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했거나, 시도조차 하지 않은 영역에 머물고 있다. 시인은 결국 감각 행위들에 대응을 통해 각각의 작품을 구축하고 사물의 존재와 주체 스스로의 실존 사이에 연결 짓고 연관시키는 일을 수행한다.
눈발이 친다 많이는 아니고
발자국 찍으며 그냥저냥
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 눈발이 날린다
맨발인 내가 신발을 신기도 전에
바우양반은 마당을 벗어나고 있다
일하는 손도 걷는 발도 여간 빠른 바우양반,
바우양반은 나와 스무 살 차도 더 난다
내 몫으로 퍼진 시래깃국을 받는다
받고 보니 내 국그릇만 대접이다
다른 국그릇보다 두어 배쯤 큰 대접,
들으면서 나는 반주 한 잔씩 올린다
바우 성님 한 잔 더 하셔야지요,
말은 못하고 그저 싱겁게 웃으면서
뒤 시간 장작을 팬 사내처럼
땔나무 서너 짐 한 사내처럼
밥그릇과 국그릇을 싹싹 비운다
- 박성우, 「어떤 대접」 전문
박성우 시인은 우리의 전통적 서정과 시법을 지켜내며 자신의 세계를 견고하고 구축하고 있는 시인이다. 그의 작품이 지닌 가치는 일반적으로 서사가 담보하고 있는 진정성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이 작품에서 더 깊숙하게 살펴보고 싶은 부분은 행간에 녹아있는 시적 주체의 감정선이다.
작품의 내용은 선명하다. 눈 내리는 어느 겨울날, 시골 마을에 살며 시를 쓰는 화자가, 동네 마을회관에서 스물 살도 넘게 차이가 나는 ‘바우양반’으로부터 “다른 국그릇보다 두어 배쯤 큰 대접"의 시래깃국 대접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일반적으로 작품을 통해 독자에게 주어진 감정은, 작품에 대응하는 감각 작용에 대한 정서적 충전으로 기술되며, 감각이 감정에 대해 갖는 상대적 우선성을 지시한다. 모든 감각은 각각의 정서적 충전을 갖는다는 말은 옳은 진술일지도 모르겠다.
“그냥저냥/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 눈발"은 안온한 정서에 선행하는 흩날리는 ‘눈발’의 감각을 제시한다. 물론 일반적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수많은 감각들이 각각의 판별적 정서적 충전을 갖는다고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 이는 우리가 일상의 목적들을 위해 우리의 감정보다는 감각에 훨씬 더 주의를 기울이는 일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 몫으로 퍼진 시래깃국" “내 국그릇만 대접이다" “밥그릇과 국그릇을 싹싹 비운다"는 표현들은 감각에서 시작된 느낌을 전제하고 있다. 이 느낌은 단지 심리적 수준의 경험을 지시할 뿐, 일반적으로 쓰이는 감정의 동의어는 아니다. 다양한 층위의 감정들을 포함하지만 감각에 주어지는 정서적 충전들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고思考가 발생하였을 때, 사고는 새로운 질서들을 지닌 감정, 즉 사고하는 사람에게서만 일방적 방식으로 사고하기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감정들을 동반한다. “나한데 항상 ‘성’이라고 부르라 하는" ‘바우양반’은 화자와 스무 살 차도 더 나고, “바우 성님 한 잔 더 하셔야지요,/말은 못하고 그저 싱겁게" 웃는 화자의 모습은 대상에 대한 개별적 사고를 통해, 심미적 수준에서 향수하는 느낌을 얻게 된다.
독자들은 이러한 과정에서 정서적 충전을 경험하게 되고, 자기 내부에서 감각되는 특이한 정서적 충전을 통해, 시인과 유사한 느낌의 경험 안에서 감각과 감정을 공유할 수 있게 된다. 「어떤 대접」에서 전해지는 밝고 건강한 연대의 느낌은 사고의 작용과 독립적으로 발생한다. “싹싹" 비워진 밥그릇과 국그릇의 느낌은 고유한 감각과 감정으로 심화되어 독자와 새로운 교감의 통로가 된다.
농아 아저씨 한분이 갖다 준 참두릅
베란다에 둔 채 까맣게 잊고 살다가
어느 날 신문지에서 펴보니
가시가 잔뜩 세어져 있다
내게 입 좀 크게 열어 말해달라던 그가
수업 때면 맨 앞자리에서
귀에 두 손을 나팔처럼 대고 엎질러진 튀밥처럼 내 소리를 쓸어 담다가
언젠가부터는 그마저도 더럽게 안 읽히는지 보이지 않길래
나는 그가 어느 산비탈 두릅나무에게서
계속해서 시를 배울 것이란 생각을 했다
그 두릅나무 선생은 때가 되면
울퉁불퉁 몸엣것을 툭툭 불거지게 내놓으며
나처럼 달달한 칭찬 대신
날카로운 가시들을 마구 방출한 것이다
맘에 안들면 아예 벌판 위로 벌렁 내다꽂을 것이다
이제야 쪼그리고 앉으니
막 세어지기 시작한 두릅나무 앞에서의
서두르던 기척과
푸르죽죽 두릅물이 오른 손목과
웅웅거리는 불편한 귓속이 보인다
귓바퀴 앞에까지 와서 되돌아가던 새소리도 들린다
- 문성해, 「두릅」 전문
우리가 느끼는 것들은 항상 지금 여기게 존재하는 어떤 것들인데, 그것들은 느껴지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그 존재가 제한되기도 한다. 물론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항상 영원한 것, 시간과 공간 안에서 특별한 거주지를 갖지 않고 시공간을 초월해 항상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어떤 측면에서 이러한 지적은 유효하다. 그러나 조금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자면 이러한 발언은 다소 과장된 진술로 여겨진다. 우리가 느끼는 것은 분명 우리가 그것을 느끼는 여기 그리고 현재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문성해의 「두릅」 역시 이러한 시공간의 감각에 대해 놓치지 않고 있다. 김포문예대학 수업 때, “농아 아저씨 한분이 갖다 준 참두릅"을 뒤늦게 펼쳐보고, 잔뜩 세어진 가시를 보면서 감각의 현재성을 구현한다. 참두릅을 가져다 준 농아 아저씨는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두릅의 가시가 “울퉁불퉁 몸엣것을 툭툭 불거지게" 내놓는 두릅나무와 그 앞에서 시를 생각하는 농아 아저씨를 소환해낸다.
우리가 일상이나 예술적 체험 속에서 겪는 느낌의 경험은 “베란다에 둔 채 까맣게 잊고 살다가/어느 날 신문지에서 펴" 본 두릅처럼 어떤 동일한 연속성을 갖추지 않은 지각적 흐름이다. 일반적으로 시에서 전해지는 느낌은, 영원하거나 재발생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것들은 다른 기회들에서 얻는 느낌의 동일함이 아니라 서로 조금씩 다른 느낌들 사이에 있는 다소간의 유사성일 뿐이다.
시인은 느낌이 저장되어 있는 망각의 처소에 형이상학적인 동화를 지어내려는 사람이다. 그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동기는 경험 전체를 하나의 느낌으로 환원시키는 시도인데, 시인은 ‘두릅’을 통해 이러한 환원을 이뤄낸다.
시에서 필요한 것은 영원히 존재하는 사고가 아니다. 영원히 재(再)발생할 수 없다 하더라도 경험의 요소로서 진정 다시 발생하는 것들에 관심을 재발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산비탈 두릅나무에게서/계속해서 시를 배울 것이"라고 사고하는 것과 “두릅나무 앞에서의/서두르던 기척과/푸르죽죽 두릅물이 오른 손목과/웅웅거리는 불편한 귓속"을 느끼는 엄연히 서로 다른 행위이며, 질적으로도 다르다.
시인은 감각과 사고의 적극적 참여과 그 조직화를 통해 세계를 단순히 대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자발성에 대응하도록 만들어 준다. 예술의 창조란 이러한 자발성의 자유로운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