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작품을 통해 존재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의미를 확보하고자 노력한다. 이러한 노력은 투명하게 혹은 은유적으로 독자에게 전달되며 시의 쾌락을 배가시킨다. 이는 상투화되고 지엽적인 내면의 퇴행 현상이 아니라 존재의 불확실성에 대한 또 다른 차원에서의 접근이다. 아래의 시를 긴 호흡으로 읽어보자.
마을 이장님으로부터 신청한 김장용 햇소금을 받았다고.
그것도 세 포씩이나 받아
뒤꼍 처마밑에 작년 것의 후배로 나란히 쌓아두고
돌아나와 툇마루에 걸터앉아 쉬자는데
집 어디선가 조용한 흥얼거림이 시작되었다고.
잔잔한, 손바닥만한 소리가
흰빛의 손수건과도 같이 자꾸만 내게 건네 오는 거야
왜인지 나는 무섭지도 않았지
누가 시키지도 가르쳐주지도 않았으나 나는
차돌멩이 하나를 찾아 찬물에 씻어서는
그 새 소금 포대 위에 작년 것과 같이 올려두었지
그러자 흥얼거림도 잦아드는 거였어
먼 고대로부터 온 흰 메아리
모든 선한 것들의 배후에 깔리는 투명 발자국
그 희고 끝없는 메아리
- 장석남, 「햇소금」 전문
근원적 삶에 대한 구체적 실감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적어도 내면의 강렬한 그리움과 사라지지 않는 향수가 있다. “마을 이장"과 “김장"이라는 잃어버린 공동체의 삶을 통해 본질적인 원형의 삶을 짚어보는 여정은 심리의 외화에 해당한다.
장석남 시의 특징은 시적 주체가 대상을 향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상 세계의 미시적 존재가 시인에게 말을 건네 오는 풍경과 방식에 있다. 그의 시가 생명 현상의 한 본류에 다가가 있으며 본질적으로 근본주의자임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모든 개체가 생명적 신성성을 부여받고 있다는 생각은 개체성의 원리이며, 이는 인간만이 단일한 인식의 주체가 아니라 세상 모든 것들이 존재적 의미를 갖추고 있다는 사고에서 시작된다. 물론 시인의 특출한 능력은 외부 사물을 객체화시키는 동시에 주체화시키면서 객체에 인격적 의미를 부여하는데 있다. “김장용 햇소금"에서 흘러나오는, “흰빛의 손수건과도" 같은 “조용한 흥얼거림"은 삶의 깊은 숨결이다.
시인은 시 속의 화자 혹은 시적 진술의 주체인 “나"와 “그 희고 끝없는 메아리" 소금은 별개의 구분을 지운다. “나"는 “햇소금"을 통해 실존적 삶을 다시금 돌이켜보게 되면서, 자신의 삶과 사물의 자리놓임에 대한 성찰을 시도한다.
그리고 화자는 햇소금을 “어떤 영혼" “먼 고대로부터 온 흰 메아리" “선한 것들의 배후에 깔리는 투명 발자국"으로 이미지화한다. 이미지의 변주를 통해 존재론적인 단위의 삶을 확장시키면서 화해의 지점으로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경험적 삶이 미학적 수준에서 직조되는 궤적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화자가 바라보는 현실적 삶에 대한 인식이 성찰의 태도로 응집되었다가 새로운 화해의 지점에 이르게 되는 과정이 장석남 시의 매력으로 작용하는 궤적을 목격할 수 있다. 시인은 조심스레 삶의 결을 어루만지고 이러한 성찰적 의지가 내면적 공간과 조응하도록 시인 고유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환청과 같은 신비한 체험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무서워하지도 않고, “누가 시키지도 가르쳐주지도 않았으나" “차돌멩이 하나" 찬물에 씻어 “새 소금 포대 위에" 올려놓는다. “그러자 흥얼거림도 잦아"들었다는 것이다. ‘어떤 영혼’, ‘먼 고대’, ‘모든 선한 것들’은 시인이 지닌 삶의 정향점을 제시하는 것으로, 현존의 다양한 관계 그물 속에서 삶의 본질과 의미를 넘어서서 근원적 의미를 추구하고 환산시키려는 상징이다.
화자는 억압된 욕망도 없이 그저 영혼의 ‘흥얼거림’을 다독이며 행간 속에서 일종의 낭만적 망명을 시도하고 있다. 더불어 시의 행간 내내 시적 긴장력이 한층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도 그의 시가 삶의 태도와 어떤 관계를 유지하며, 어떤 방식으로 초월적 세계를 탐구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시인이 보여주는 초월의 세계, 본원의 세계는 삶의 진실을 찾기 위해 설정된 대타적 공간이기도 하며, 인간 존재의 유한성에 대해 철저하게 인식하고 삶의 진실을 부각시키기 위한 비의를 담고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숲에는 바닷물이 흔들리고 있다 산 사람은 이불을 좋아하고 죽은 이는 이불 훔치는 걸 좋아한다
내 팔에 누워 자는 사람은 오른쪽이 희미해졌다 가벼운 쪽부터 희미해졌으니까 능선과 골짜기 사이가 희미하다
솜이불 속에서 우리는 희미하다 이불을 살 때마다 네가 벌써 희미해지는 것처럼, 걷다가 우리는 날아간다
나무는 앉아버리고 구름은 날아간다 희미해지면 너는 혼자 흰머리를 씻는다 내가 몰아간 희미함으로
- 김경주, 「희미하게 보면」 전문
위 시에서 보여주는 화자의 태도는 불안한 실존에 대한 자기 인식, 혹은 존재의 함몰에 가깝다. ‘희미함’으로 소환되는 불안과 상실감은 사실, 존재의 원인이면서 동시에 시적 상황에 대응하는 시인의 내적 체계를 유지하게 만든다. 불안에 대한 언어적 자각 없이 시인은 자신의 운명을 감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삶의 현실적 조건이 황량하고 메마를 때, 시인의 자신의 관념 속에서 실존에 대한 확인의 차원으로 나아간다. 현실과 절연된 ‘숲’에서 시인은 삶과 죽음을 넘나든다. ‘너’는 “내 팔에 누워 자는 사람"이면서 “죽은 이"의 양가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실존의 부재, 실존의 불투명성을 통해 시인은 대상을 인식하고자 하는 의지의 적극성을 방기한 상태로 시적 본질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한다.
시인의 내적 풍경은 “희미함"의 변용으로 드러난다. “희미해졌다" “희미해졌으니까" “희미하다" “희미해지는" “희미해지면" “희미함으로" 등의 표현을 통해 시인은, 대상과의 의지 작용 사이의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이 흔들림에는 시인의 의지가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불가항력적, 무위로서의 ‘흔들림’은 너와 나의 관계 상실을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 고독 속에서만 자신의 실존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상황의 새로운 차원이 된다. “흔들리고" “앉아버리고" “날아간다"의 동사로 수렴되는 세계와의 단절, 너의 상실은 결국 시인이 자기 언어의 대타적 존재 방법으로 향한 것 같지만, 결국은 자기 성찰의 한 방식이다.
시인이 그려내고 있는 고독한 풍경, 더구나 시적 형식으로 빌린 이 존재적 풍경은 현실적 의미로의 관계를 거부하면서 자신의 언어를 외로움의 끝으로 몰아가려는 순수한 의지이기도 하다. 즉 세계를 내면화하려는 시도이다. “오른쪽"부터, “가벼운 쪽부터" “사이"가 희미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주변성으로 일탈해가는 화자의 실존은 관찰의 세계 너머에 있는 투명한 의식에 가닿는다. “희미해지는" 존재에 대한 반성적 인식과 안타까움에 대한 내면적 심도는 이 시의 마지막 연에서 그 의미를 심화 확대하고 있다. 여백의 언설성, “내가 몰아간 희미함으로" “혼자 흰머리를 씻는" 너는, 화자의 또다른 내면이다. 롤랑 바르트는 상처가 깊을수록 주체는 더욱 철저하게 주체가 된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주체의 삶이 타자화된 상황에서 주체의 현존성에 대한 분리된 이해는 김경주가 자신의 시를 심화시키는 독특한 전략으로 읽히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