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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럼

영원한 이별이란 없다

“어머니 품에서 자란 자식은 커서 나이 든 어머니를 보살핀다”

글  김재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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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쪼그려 앉아 당신의 두 손을 눈앞에 당겨 가만 보시다가, ‘이젠 너무 많이 늙었구나. 가야 할 날이 다 됐구나.’ 하시며 슬퍼하시던 모습이 선연히 떠올랐다"고 꿈속에서 그는 내게 말했다.

  

이 무슨 봉변 같은 꿈인가. 이젠 남의 꿈까지 대신 꾸는가. 아니면 이는 필시 어떤 예지몽(豫知夢)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생명 속의 죽음을 보는 어떤 본능적 현상인가. 모르겠다. 몰라도 된다. 그나 나나 누구나 어머니와의 이별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고 회피하려고 하는 건 똑같다. 생사의 이별만 아니라 이승에서의 이별 또한 두렵고 무섭고 피하고 싶은 것은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어린아이의 젊은 어머니만 아니라 나이 든 자식의 늙은 어머니도 언제나 절대적이다.

  

그런 어머니와의 이별은 예감이 아니라 필연이다. ‘슬퍼하시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애통해 하는 그의 모습은 꿈속에서도 절박해 보였다. 하릴없이 어머니께 전화를 넣었다. 신호음이 간다. 전화를 받으시는 시간이 평소보다 길다. 순간 괜한 걱정이 스친다. … 불안 … 초조 … 한참이 지나 마침내 받으신다. “설거지 한다꼬 물 틀어나 전나 소리 몬 들었제."라는 행복한 소리. 그러나 어느 날 전화를 받지 않는 순간이 온다면, 미구(未久)에 꼭 그런 날이 오고야 말 것인데.

  

“남녘 장마 진다 소리에 / 습관처럼 안부 전화 누르다가 / 아 이젠 안 계시지……"라는 고두현 시인의 「한여름」은 어쩌면 시라기보다 단순한 기록에 가깝다. 그는 분명 전화기를 들었을 것이다. 머리가 아니라 ‘손’이 번호를 누르다 일순간 떠오른 생각, “아, 안 계시지……." 그렇다면 간밤의 꿈은 어머니와의 이별을 예감케 하는 예지몽이 아니라 언제고 반드시 오고야 말 어머니와의 영원한 이별을 두려워하는 본능적 반응일 터다.

  

하지만 생사의 이별만 아니라 생이별은 또 다른 고통이다. 자식 쪽에서 생이별은 그야말로 생존의 문제를 야기한다. 유원지의 인파 속에서 아이를 잃어버렸다는 소식은 끊임이 없고, 가난 때문에 함께 살 수 없어 입양시켰다는 경우도 많다. 또 어린 미혼의 엄마가 뜻밖의 출산 끝에 어느 집 대문 앞에 아이를 놓고 떠났다는 무참한 뉴스도 종종 들린다. 다행히 한반도에서 ‘전쟁고아’란 말은 이제 현재성을 잃었지만, 그밖에도 부득이한 수많은 사연으로 생이별의 고통을 겪는 일은 앞으로도 끊이지 않을 것이다.

  

  

첫새끼를 낳노라고 암소가 몹시 혼이 났다. 얼결에 山길 百里를 돌아 西歸浦로 달어났다. 물도 마르기 전에 어미를 여힌 송아지는 움매- 움매- 울었다. 말을 보고도 登山客을 보고도 마고 매여달렸다. 우리 새끼들도 毛色이 다른 어미한틔 맡길 것을 나는 울었다.
- 정지용(1902-1950), 「白鹿潭」 중에서

  

  

과연 이런 허무맹랑한 어미도 있을까만, 송아지는 지금 목숨이 위태롭다. 어미를 찾아야 한다. ‘물도 마르지 않은’ 송아지는 어미 없이 생존할 수 없다. 그러니 말을 보고도 움매-, 등산객을 보고도 움매- 움매- 하며 운다. 놀란 어미야 때가 되면 마음을 진정하고 살아갈 테지만, 송아지는 꼭 어미를 찾아야 한다. 송아지가 그럴진대 사람의 자식이면 어떻게 하겠는가. 정지용 시인의 기록과 같이 모든 어버이는 자기 자식을 ‘모색이 다른 어미에게 맡길 것’을 슬퍼서 운다. 그것도 시집 『白鹿潭』이 간행된 1941년 일제 말기라면 더욱 슬플 수밖에 없다.

  

예나 이제나 어머니 품에서 자란 자식은 커서 나이 든 어머니를 보살핀다. 보살핌의 방식이야 세월 따라 변해 왔지만, 부모의 자식 돌봄만큼 자식의 부모 섬김도 보편적이다. 생이별의 위험에서 벗어난 부모와 지식은 그때부터 길고 긴 진짜 이별을 준비하는 것인지 모른다. 부모 쪽에서는 돌보면서, 자식 쪽에서는 섬기면서. 그러나 마침내 때가 되어 이별의 순간이 왔을 때 우리는 대부분 속수무책의 절망감을 느낀다. 슬픔과 분노와 자탄과 반성의 일순간은 그간의 준비를 무색하게 만들어 버린다. 어머니가 절대적인 만큼 죽음도 절대적인 것이다.

  

  

     어머니를 묻고 돌아오는 길
     구례구에서 남원, 오수역에서 임실까지
     안개비 속에 온 산천이 잔잔한 싸락눈에 덮인다
     - 이시영(1949- ), 「三虞後」 중에서
  

  
슬픔의 순간을 지나고 분노와 자탄과 반성의 순간을 넘어서면 그 자리엔 이처럼 더욱 깊은 한(恨)이 자리하는 것인지 모른다. 안개비 속에 잔잔한 싸락눈이 덮이는 어느 산천은 곧 어머니를 묻고 돌아오는 시인의 마음이다. 어머니의 육신은 땅에 묻혔지만, 어머니의 영혼과 어머니와의 모든 기억은 자식의 가슴에 묻힌 것이다. 그렇다면 생사의 이별이란 것도 사실은 이별이 아닌 셈이다. 어머니는 자식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자식은 어버이로 인하여 태어나 살아가고, 어버이 또한 자식으로 인하여 살아가고 기억된다. 생이별도 생사의 이별도 부모와 자식 모두에게 견딜 수 없는 아픔을 주지만 어느 경우에도 영원한 이별이란 없다. 이별을 어떤 단절이라고 한다면 부모와 자식의 단절은 영원히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두 기억에서 기억으로 하나의 몸이다. 이는 생물학적 사실만이 아니라 경험적 진실이기도 하다.

  

  

     함경도 고산에 경원선 신고산역(驛)이 생기자
     우루루루 함흥 차 가는 소리에
     구고산 큰애기는 밤 봇짐만 쌌단다

    

     - 중략 -

    

     메나리조로 함경도 땅 절절이 울리며
     볶는 타령이든 지지는 타령이든
     한 백년 참 구슬프게 흘렀단다
     - 졸시, 「어랑타령 - 안연희 여사께」 중에서

  

  

  

[입력 : 2019-06-30]   김재홍 기자 more 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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