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람이 멈춘 다음날, 야마나시(山梨)의 하늘은 맑고 푸르렀다. 구름들이 휘감고 있는 3,776m의 후지산(富士山)이 한눈에 들어왔다. 구름 사이로 몇 줄기 만년설도 보였다. 시즈오카(靜岡) 여행 시절 후지산을 여러차례 통과하면서도 구름의 훼방으로 제대로 보지 못했으나 이날은 운(運 )좋게 눈을 맞출 수 있었다.
“자! 갑시다."
‘아사카와 노리타카(淺川伯敎)·다쿠미(巧) 형제 추모회’의 치노 쓰네오(千野恒郞·77) 회장이 노익장을 과시하면서 앞장섰다.
아사카와 노리타카·다쿠미 형제의 생가 터
두 형제가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낸 생가 터는 자료관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다카네초(高根町) 고초다(五丁田) 294번지. 동쪽으로는 긴포산(金峰山), 남동쪽으로는 후지산, 북쪽으로는 야쓰가타케(八ヶ岳)가 보이는 아늑하고 예쁜 농촌이었다. 노리타카·다쿠미 형제는 이러한 자연 속에서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마음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생가 터에는 말뚝 세 개뿐 아무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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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치노(千野) 회장에게 의견을 제시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그렇지 않아도 저희 추모회가 나고야(名古屋)에서 살고 있는 땅 소유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값을 비싸게 부르더군요(웃음)."
추모회의 모금으로 땅을 사는 것은 버거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치노(千野) 회장의 표정으로 봐서 언젠가는 뜻이 이뤄질 것으로 보였다. ‘아사카와 노리타카·다쿠미의 탄생지’라는 비석도 생가 터에서 100m 정도 떨어진 공원 입구에 세워져 있었다. 이 또한 추모회가 해결해야 할 숙제일 듯싶었다.
450여 명이 참석한 총회, 날씨만큼 뜨거워
노리타카·다쿠미 형제를 추모하는 모임의 총회는 6월 16일 오후 1시 30분부터 ‘야스가타케(八ヶ岳) 메아리 홀’에서 열리는 것으로 예고돼 있었다. ‘메아리 홀’이라는 이름이 야마나시의 특성과 잘 맞아 떨어졌다.
오후 1시가 되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이 많았으나 젊은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450여 명 홀의 좌석은 삽시간에 꽉 메워졌다. 1시 30분이 되자 사무국장 히나타 요시히코(比奈田善彦·65)씨가 마이크를 잡고서 총회의 시작을 알렸다.
“지금부터 아사카와(淺川) 형제를 추모하는 모임의 총회를 시작하겠습니다."
호쿠토(北杜) 시장·시의회 의장 등 내빈 소개에 이어서 치노 쓰네오(千野恒郞) 회장이 인사말을 했다.
인사말을 하는 치노 쓰네오 회장
“회원 여러분! 레이와(令和) 원년 6월 16일, 저희 모임의 총회가 성황리에 개최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저희 추모회는 1996년에 발족한 이래 23년째를 맞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회원이 많아진데 대해 참으로 감사드립니다...특히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1891-1931)는 지난 2015년 ‘한국의 발전에 기여한 세계의 70인’ 중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어 명실 공히 ‘한일을 연결하는 가교(架橋)를 건설한 인물’로 평가되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고, 서울시 망우리에 있는 그의 묘역에 ‘한일 우호의 표지석’을 설치하려는 것을 실현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지금 양국의 우호관계가 걱정이 되고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민간의 교류를 추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사카와 형제의 마음’은 지금도 일본과 한국에서 살아 있습니다. 두 형제의 박애 정신을 한일 양국의 차세대에 계승시키기 위해서, 한국문화원과 도쿄한국학교, 호쿠토시의 교류를 보다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습니다."
치노 쓰네오 회장은 ‘민간교류를 확대해서 양국의 거리를 좁히자’면서 ‘아사카와 형제의 박애 정신을 후세에 계승하자’고 강조했다. 맞는 말이다. 정치성이 없는 순수한 민간교류의 확대가 필요한 시점이다.
총회에서는 사업 방향과 예산 집행 등 여러 가지 현안들을 논의 했으나, 중요한 안건은 ‘다쿠미의 기념비’에 대한 것이었다.
어떠한 내용일까.
조선일보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광복 70주년(2015년)을 맞아 ‘한국의 발전에 기여한 세계의 70인에 아사카와 다쿠미가 포함됐다’는 사실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는 일이다. ‘아사카와 노리타카·타쿠미 형제 추모회’ 회원들은 ‘한국 발전에 기여한 인물(아사카와 다쿠미)’에 큰 의미를 두고, 그의 족적을 길이 남기기 위해서 정성스럽게 모금 운동을 펼쳤다. 정성의 결과물은 오는 10월, 그의 묘역에서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다.
이번 총회에서는 이명렬(54) 주(駐)요코하마대한민국총영사의 기념 강연이 눈길을 끌었다.
요코하마 총영사의 강연...참석자들로부터 뜨거운 박수 받아
강연을 하는 이명렬요코하마 총영사
“오늘 이토록 귀중한 자리에 초대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아사카와(淺川) 형제의 이야기는 책과 영화(道, 백자의 사람)를 통해서 한일 양국에 소개돼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됐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100년 전에 민족의 벽을 넘어 한국의 삼림과 한국인을 사랑한 아사카와 선생은, 지금도 많은 한국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 일본인입니다.(...)
화제를 잠깐 바꾸겠습니다. 유전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DNA분석에 의하면 한국인과 일본인은 대부분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양(兩)민족은 유전자적으로 사실상 형제의 관계인 것입니다. 백제가 멸망할 당시 일본은 혈연관계로 여겨 지원군을 파견할 만큼 형제의 관계였다고 역사학자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한일 양국은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통한 교류에 의해서 한일 관계의 진정한 정상화가 이뤄지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강연을 듣는 참석자들의 진지한 모습
참석자들은 이명렬 총영사의 강연 내용이 자신들의 생각과 일치하는 듯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박수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산골마을로 퍼져나가는 듯했다.
후지카와(富士川)이야기...한일관계의 토대는 사람
연극 ‘후지카와(富士川) 이야기(物語)’는 실제로 있었던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극(劇)의 내용이다.
<일본은 태평양전쟁 준비를 위해서 전투기의 재료인 알루미늄이 필요했다. 알루미늄 공장 운영을 위한 대량의 전력이 필요한 까닭에 각 지역에 발전소 건설을 추진했고, 후지카와의 취수를 위한 터널 공사도 있었다. 여기에 많은 조선인이 동원됐다. 이들 중에 초등학교 6년생인 손춘임(孫春任)이 있었다. 일본 이름은 하루코(春子). 이들 가족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일본인들로부터 핍박을 받기도 했으나, 인정 많은 일본인 선생님(武井善人 분)도 있었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목포의 눈물이 배경으로 깔리고 막걸리를 마시면서 도라지 타령을 하는 노동자(雨宮徹周 분)의 연기도 일품이었다.
도라지 타령을 하면서 막걸리를 마시는 극의 한 장면
<이 산에서 목숨을 잃은 동포여!/ 이 강에서 목숨을 잃은 어린이여!/ 지금도 후회하고 있는 저 쪽의 나라로부터/ 빛이 되어 찾아 오리요.>
이 연극은 야마나시 현민(?民)문화제에서 상은 받을 와타나베 슈코(渡邊修孝)씨의 수필<손춘임의 일>을 희곡으로 만든 것이었다. 97세의 와타나베씨가 무대에 올라 관객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
연극이 끝난 후 메아리 홀의 로비에서 극작가 미즈키 료(水木亮·77)씨를 만났다. 그의 말이다.
“후지카와는 나가노(長野)·야마나시(山梨)·시즈오카(?岡) 현을 흐르는 128km의 강입니다. 이 강은 인간의 삶과 흐름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극의 내용은 후지카와 강변에서 일어난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작가도, 배우도, 관객들도 ‘한일관계의 토대는 사람이다’는 것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는 듯했다. 하루코(春子)를 넘어 손춘임(孫春任)의 마음으로(계속).
[입력 : 2019-06-28]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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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30년 넘게 현해탄을 넘나들며 일본인들과 교류하고 있는 홍보컨설팅회사 JSI파트너스의 대표다. 일본비즈니스 전문가로도 정평이 나있다. 동국대를 졸업하고 육군 제2훈련소 교관(ROTC11기)으로 군(軍) 복무했다. 직장생활의 대부분을 대우에서 보냈다. 대우건설 재직시절 철옹성 일본 건설시장의 문을 열었다. 대우건설 문화홍보실장(상무)에 이어 팬택계열 기획홍보실장(전무)을 역임했다. 2008년부터 지금의 JSI 파트너스 대표이사로 있다. 일본의 정계·관계·업계·언론계 등 두터운 인맥을 갖고 있다. 한편 비즈니스를 하면서도 칼럼니스트로 여러 매체에 일본 관련 글을 쓰고 있다. 특히 일본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면서 현장을 직접 보고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