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애증이다. 특히 한쪽의 일방적인 외도와 배신으로 생긴 애증이라면 그 깊이와 끝은 종잡을 수 없고 그 결말은 대부분 이혼이라는 파국을 향하기 마련이니까. 파국을 면하는 경우는 경제력이 없었던 우리 어머니 세대에 아내들의 일방적인 희생과 초인적인 인내심이 발휘되었을 때나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우리나라 부부의 이혼률이 50%를 넘기며 일찌감치 OECD국가 중 1위를 찍었다지만 좀 과장하자면 부부가 마음먹은 대로 이혼을 실행에 옮겼다면 아마도 지금쯤 마스크 5부제와 함께 ‘이혼신고 5부제’가 시행되고 있지 않을까? 그도 모자라 국회에선 모든 커플이 결혼 10주년이 지나면 결혼생활을 유지시킬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율이혼선택제’를 통과 시키자는 법안에 여야가 보기 드물게 만장일치로 합의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요즘 영국 BBC One의 드라마 <닥터 포스터>를 리메이크한 Jtbc금토 드라마 <부부의 세계>가 화제다. ‘불륜’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도 한몫을 했겠지만 그보다는 이 드라마에서 남편의 ‘불륜’에 대처하는 여주인공의 방식에 거는 시청자들의 기대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두 여자를 똑같이 사랑한다’는 간이 배 밖으로 탈출한 남자가 여기 또 있다. 바로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영화 행복(Le Bonheur/1964년作)의 주인공 프랑수아다. 아내와 두 아이를 사랑하는 지극히 성실하고 다정다감한 가장(家長) 프랑수아는 어느 날 우연히 우체국에서 일하는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두 여자를 동시에 사랑하며 ‘최극강 이기주의자의 행복감’을 맛본다. 게다가 프랑수아는 자신의 양심까지 지키겠다고 아내에게 있는 그대로를 고백한다. 아내는 큰 충격에 휩싸였지만 ‘당신이 행복하면 된다’며 사랑하는 프랑수아와 마지막 사랑을 나누고 호숫가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아내의 빈자리는 프랑수아의 새 연인이 대신한다. 분노는 관객의 몫으로 남긴 채 영화는 끝난다.
반면 2004년 제44회 몬테카를로 TV페스티벌 골드림프상 수상작 MBC베스트극장 <늪>(도현정 극본/김윤철 연출)의 주인공 박윤서의 배신한 남편에 대한 치밀한 복수는 섬칫하다 못해 처절하다.
성형외과 의사 박윤서는 남편의 외도 상대가 자신의 어린 딸을 믿고 맡겼던 후배 채원임을 알게 되고, 그로 인해 남편과 자신의 경제적 후원자였던 친정아버지까지 잃게 되자 의사라는 직업을 백분 활용해 복수한다. 채원을 정신병원에 가두고, 준영에게 정관수술(극중 거세수술일 지도 모른다는 암시도 줌)을 시행하고 결국엔 오피스텔 옥상에서 준영이 타고 있는 차 위로 뛰어내려 생을 마감한다. 그야말로 파국이다.
<부부의 세계> 원작 드라마 <닥터포스터>가 모티브로 따왔다는 그리스 신화 메데이아와 이아손의 파국이 떠오르는 결말이다. 사랑이 전부인 여자 메데이아는 욕망(성공)이 전부인 남자 이아손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하고 희생한다. 그 결과가 배신으로 돌아왔을 때는 역시 자신의 모든 것을 이용해 복수한다. 심지어 자신의 분신인 두 아들까지도 이아손에 대한 복수의 도구로 희생시킨다.
이러한 메데이아의 끔찍한 애증을 <닥터포스터>에서는 처참하게 파탄 난 가정으로 보여주었다. 젬마와 사이먼 부부는 물론 둘 사이에서 상처받은 사춘기 아들 톰의 가출로 가정은 해체됐다. 물론 사이먼이 젊은 애인과 꾸린 가정 역시도 온전할 리 없다.
“뭐라 그랬어 방금?"
(중략)
“이제라도 태오씨가 솔직하게 인정하고 깨끗이 정리하면 나 용서할 수도 있을 것 같애."
“여자가 있냐고? 바람 피나고? 내가?...대체 날 뭘로 보는 거야?"
“더 이상 날 실망시키지마!"
“실망은 내가 했어. 나한테 여자는 지선우 너 하나밖에 없어!"
(중략)
“이태호한테 여잔 지선우밖에 없다며?"
“그래."
“그래 그걸로 충분히 대답이 됐어. (이 개새끼야!)"
완벽했다고 믿었던 삶이 남편 이태오와 남편에게 공조한 주변 지인들의 완벽한 배신으로 한순간에 지옥으로 변해버린 지선우의 삶은 그 어느 드라마에서도 볼 수 없었던 ‘지선우표 분노’를 선보이며 첫회 방영만으로도 시청자들의 충분한 공감을 이끌어냈다.
이 점에서 이후, Jtbc금토 드라마 <부부의 세계> 흥행의 향방은 지선우가 빼든 복수 칼날 역시 시청자들의 충분한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