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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단순한 기쁨’이었겠는가

“광복절과 추석과 가을운동회의 기억”

글  김재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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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봉과 평행봉과 시소와 그네가 있는 운동장 뒤편에 나란히 앉아 삼삼칠 박수를 치던 날, 그날은 공장에 나가던 아버지도 들일을 나가던 어머니도 놀고 싶은 형도 어린 누이도 모두 학교엘 왔었다. 생각난다. “보아라, 이 넓은 운동장에 청군과 백군이 싸운다. 청군과 백군이 싸우면은 보나마나 ‘우리 편’이 이기지”라는 노래. 사진=김재홍

흙바닥 운동장 조회대 맞은편에 합판으로 만든 아치를 세우고, 하늘에는 만국기를 주렁주렁 걸었었다. 갈바람 날쌔게 휘돌아 펄럭이는 국기들 사이로 청군과 백군은 모자를 쓰고 혹은 머리띠를 매고 행진을 시작했다. 철봉과 평행봉과 시소와 그네가 있는 운동장 뒤편에 나란히 앉아 삼삼칠 박수를 치던 날, 그날은 공장에 나가던 아버지도 들일을 나가던 어머니도 놀고 싶은 형도 어린 누이도 모두 학교엘 왔었다. 생각난다. “보아라, 이 넓은 운동장에 청군과 백군이 싸운다. 청군과 백군이 싸우면은 보나마나 ‘우리 편’이 이기지."라는 노래.

  

한여름에 가을운동회 얘기를 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개학을 하면 곧 추석이었고, 추석을 쇠면 가을운동회라는 한판 신나는 축제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았다. 비록 한참 밀린 방학 숙제는 어린 가슴을 옭죄는 날카로운 바늘이었지만, 그것으로 인해 가을운동회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공식적으로 수업이 없을 뿐 아니라 나들이처럼 온 식구가 김밥과 사이다를 나눠 먹으며 같은 구호를 외치는 재미는 대체재가 없는 특상품이었다. 운이 좋아 공책이나 물감을 탄다거나 여자애들의 갑작스런 환호성을 들을 때의 감격적인 기분은 덤이었다.

     

그런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시간적 계기는 바로 광복절이었다. 이미 방학 중이니 어린아이들에게 광복절은 특별한 기념일일 수 없었지만, 아침부터 특집방송에다 대낮에도 방송을 하는 날이었고 각종 만화영화들이 연이어 나오는 것은 그나마 공휴일의 보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광복절에 우리는 다가올 개학일과 추석과 가을운동회라는 시간적 연쇄를 떠올렸다. 그것은 한편으로 불안하고 한편으로 설레는 이중적 심리 상태를 유발하는 계기였다.

  

  

     어느 여름날 백양나무 그늘 아래서

     검정 치마 흰 저고리 차림의 처녀 선생님으로부터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를 배울 때

     느릿느릿 날개를 접고 날으던 나비 그림자며 

     괜히 퉁방울눈을 뜨고 울어제끼던 매미 울음소리며

     그리고 그 위의 한가한 구름이랑 

     - 이시영(1949- ), 「단순한 기쁨」 전문

  

  

이 작품은, 50년대 초등학생들의 스승인 여선생님들은 ‘검정 치마와 흰 저고리’ 차림이었다는 것, 그리고 교실은 백양나무 그늘이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한여름의 이 아름다운 수업이 설마 ‘단순한 기쁨’이었겠는가. 검정 치마 흰 저고리 차림의 처녀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시던 「광복절 노래」가,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는 그 경쾌한 가락과 힘차고 씩씩한 기상이 설마 ‘단순한 기쁨’이었겠는가. 이시영 시인의 「단순한 기쁨」은 결코 단순할 수 없는 광복의 감동을 매우 짧은 한 편의 소품으로 깔끔하게 기록했다. 또 한 후학의 가슴에 남은 ‘불안과 설렘의 이중 심리’를 기쁘게 각성시켜 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광복의 감격마저도 세월에 따라 휘발되고 있는 현실도 날카롭게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광복절만 아니라 삼일절과 제헌절과 개천절과 한글날까지 모두 단지 공휴일로 생각하며 지내는지 모른다. 때가 되면 우리는 연휴라느니 징검다리 휴일이라느니 하면서 나들이나 해외여행을 생각하기 일쑤다. 시간의 강력한 휘발성이야 다시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며, 때문에 국경일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서서히 변하는 것도 얼마간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의 마수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광복절까지 그렇게 취급하는 데에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독도 문제,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 문제 등은 아직 살아 있는 현안들이며, 잊어버리기엔 너무 선연하고 너무 가까운 고통들이다. 채 100년도 안 되었다.

  

「단순한 기쁨」의 시적 화자는 어린이가 아니다. 어린 시절의 풍경을 돌이켜 보는 어느 중년이다. 여름날 나무 그늘 아래서 젊은 여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광복절 노래」의 경쾌함과 씩씩한 기상을 그리워하는 사람이다. 더불어 ‘날개를 접고 날으던 나비’와 ‘괜히 퉁방울눈을 뜨고 울어제끼던 매미’와 ‘그 위의 한가한 구름’을 통해 그는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화폭을 자신의 정서적 고향으로 반추하고 있다. 그는 그것을 ‘단순한 기쁨’으로 명명하면서도 어떤 ‘절대적 기쁨’으로 인식하고 있다. 원형 혹은 기원은 언제나 우리를 기쁨과 행복과 안정으로 이끌어 준다.

   

「단순한 기쁨」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과거의 원형을 반추하는 유장한 흐름 속에서도 「광복절 노래」의 기상이 삽입돼 경쾌하고 밝은 언어적 흐름을 보여준다. 한 순간, 한 장면, 한 사건에 대한 감상적 비유와 날렵한 표현 욕망을 자제할 줄 아는 중후한 언어가 읽는 이의 마음을 광복 즈음으로 이끌어 간다. 민족 공동체의 동질감과 정서적 일체감을 유발하는 시적 경험의 공유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민족의 통일은 이념과 정체(政體)의 통합이 아니라 무엇보다 정서의 공유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것이 문학적 경험의 공유에서 비롯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우선 여기에 「광복절 노래」의 힘차고 벅찬 감격의 기운을 담은 노랫말을 다시 옮긴다.

  

  

        1절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 하리  

     이 날이 사십 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2절

     꿈엔들 잊을 건가 지난 일을 잊을 건가

     다 같이 복을 심어 잘 가꿔 길러 하늘 닿게

     세계에 보람될 거룩한 빛 예서 나리니 

     힘써 힘써 나가세 힘써 힘써 나가세

     - 작사 정인보(1893-1950)ㆍ작곡 윤용하(1922-1965), 「광복절 노래」 전문 

  

  

   

[입력 : 2019-08-14]   김재홍 기자 more 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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