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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하늘의 마음으로

“그것이 바로 우리를 위하는 유일한 길”

글·사진  김재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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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진정으로 반성하는 동물이라면 죄의 경중이 아니라 마음에 비추어 거슬리는 모든 것을 반성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반성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우리를 위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지 다른 무엇 때문이 아니다. 사진=김재홍

날마다 죄업을 쌓고 또 쌓으며 살고 있다. 크든 작든 마음에 걸리는 일은 매일 시시각각 벌어진다. 종교적 구도 행위나 염결주의자의 자기 검열이 아니더라도 마음에 비추어 흠이 되는 일을 꺼리면서도 죄의식을 유발하는 일은 끊임없이 생기고 만다. 자신의 생을 죄로 들씌우려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럼에도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만큼 죄업도 끊이지 않는다. 어쩌면 죄란 바로 내 곁에서 나와 살을 맞대고 있는 또 다른 나 자신인지도 모른다.

  

나의 존재와 함께하는 나의 죄는 절대적이다. 그래서 반성 또한 절대적이다. 끊이지 않는 죄만큼 반성 또한 멈출 수 없다. 택시기사를 하던 외삼촌의 돼지저금통에서 백 원짜리 동전을 표 나지 않게 계속해서 야금야금 훔쳤던 일이라든가, 동네 가게에 진열된 사과를 훔쳐 팬티 속에 넣고 도망치다가 들킨 일이라든가, 설이나 추석에 여동생이 어른들로부터 받은 푼돈을 빼앗아 쓴 일이라든가, 또 무슨무슨 절도와 폭력과 강도 행각들을 끊임없이 저질러 왔다.

  

더 커서는 끼리끼리 몰려다니는 왈패가 되어 정욕에 눈먼 간음과 음탕은 물론이고, 거창하게 역사와 사회를 들먹이며 거대 죄악 앞에 작은 죄는 죄가 아니라는 식의 막무가내 행악도 적지 않았다. 속이 텅 빈 정의감만으로는 결국 아무 것도 바꿀 수 없었고, 그런 만큼 죄의식은 무뎌지고 반성도 드물어졌다. 죄가 일상의 틈새에 소리 없이 파고드는 사이 죄의식은 영혼의 틈새를 빠져나와 허공으로 산일되는 악의 고리가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니 직장에 들어가 22년을 다니면서 저지른 무수한 죄업은 일일이 다 찾아낼 수가 없다. 나로 인해 몸과 마음의 고통을 겪었을 많은 선후배들에게 용서를 빈다. 나로 인해 채널 경쟁력과 시청률과 점유율을 높이는 데 그다지 도움을 받지 못한 회사에 용서를 빈다. 또한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고 날마다 시(詩)를 기웃거리는 나로 인해 매출액과 순이익 목표 달성에 지장을 받은 여러 해에 대해 용서를 빈다. 그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무수한 죄업에 대해서도 용서를 빈다. 아니다, 벌을 청한다.

  

  

     독립을 요구하는 체첸의 전사들이
     몸에 폭탄을 주렁주렁 매달고
     어린 학생들이 개학식 하던 날 학교를 점거했고
     거기서 500명이 넘는 아이들과 부모를 죽였다.
     (전사들과 함께 태어난 죽은 자를 위하여 묵념을……)

    

     그 전에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는
     여객기가 통째로 폭탄이 되어
     콘크리트 덩어리와 함께 수천 명의 사람을 아주 무너뜨렸다
     - 졸시, 「다시 살아가는 것」 중에서

  

  

현실에서 죄란 절대적이면서 상대적이다. 체첸 전사들의 살육을 조국 독립 투쟁으로 미화하는 일이 가능한 세상이며, 3천 명이 넘는 생명을 앗아간 911 테러를 미국인과 유대인에 대한 이슬람의 성전 수행으로 정당화시킬 수 있는 게 이 세상이다. 시인 혼다 시사시의 「증언」에 이런 구절이 보인다. “한 사람의 갓난아기를 희생시켜 / 한 사람의 병사를 죽인다 / 폭탄을 우유병에 설치했을까 / 아니면 기저귀 속이었을까"

   

무엇을 위하여 저지르는 행위가 상대화될 때 죄악은 정당화된다. 아기 기저귀에 숨긴 폭탄이 터지면 수십 수백 명의 병사가 죽을 수 있다. 그리고 아기는 희생자가 되고, 병사들의 죽음은 영웅적 전과(戰果)가 된다. ‘죄의 절대성을 상대화시켜서는 안 된다’고 간단히 말할 수 없는 게 우발적인 욕망과 욕망이 뒤엉켜 난마와 같은 중층 우발성으로 교직되어 있는 게 세상이기 때문이다. 개인과 집단과 국가의 욕망은 본질상 상대적이므로 이들의 참혹한 죄악마저도 상대화시킬 수 있는 게 우리의 현실 세계다.

   

우리가 나치의 학살과 일제(日帝)의 살육을 용서할 수 없는 만큼 어떤 죄악도 절대적으로 부정되어야 한다. 만일 죄악을 절대적으로 부정할 수 있다면 아무런 근거 없이 매겨진 죄의 층차(層差)도 사라질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반성하는 동물이라면 죄의 경중이 아니라 마음에 비추어 거슬리는 모든 것을 반성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반성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우리를 위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지 다른 무엇 때문이 아니다.

   

그러나 절대적 죄악의 반성에 앞서 절대적으로 다스려져야 할 것은 욕망이다. 인간은 반성적 동물이기에 앞서 욕망하는 동물이다. 생산적 욕망을 정당화하는 많은 주장에도 불구하고 절제되지 않은 과도한 욕망은 언제나 폭력과 살육을 야기했다. 절대적 욕망을 다스리는 길은 자연에 순명하면서도 하늘의 준엄한 명을 따르는 것뿐이다. 우리가 욕망을 다스리는 불가능해 보이는 길을 갈 수 있다면 그만큼 우리의 죄악은 다스려질 것이다. 그러니 다시 하늘과 하늘의 마음으로 돌아가야겠다.

   

  

     인구 15억 중국 양쯔강 아랫녘에
     해가 뜨면 일 하고 달뜨면 잠자는
     30만 식구 거느리고 사는 남만(南蠻) 이족이 있다
     다행히 석유가 나오지 않고
     해발 2,600미터 고지에서 민족도 국가도 없이
     결혼도 없이 싸울 생각도 없이
     바다 같은 호수 속에서 물안개 속에서
     백년쯤 살다 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도 올 여름은 참 무더웠을 거야)
     - 졸시, 「다시 살아가는 것」 중에서

  

  

  

  

  

[입력 : 2019-07-21]   김재홍 기자 more 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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