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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것들

“그들은 지금 내 곁에 없지만 앞으로도 영원히 내 곁에 있을 것이다”

글  김재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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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짐 혹은 사라지는 것들, 사라지는 이름들과 얼굴들이 있다. 완전한 사라짐이란 사라짐 자체까지 사라지게 하므로 현실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내게서 사라지는 이름들과 얼굴들은 어디까지나 내 기억의 심연에 오롯이 살아 있는,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다. 그러나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서 더욱 소중한 것들이 사라지고 있다. 한밤이고 한낮이고 취중이고 아니고 불현듯 떠올라 마음 깊은 곳에 상처를 입히는 것들이 있다.

  

이를 뇌의 노화 혹은 장기기억(long term memory)의 약화라고 말하지 않기로 한다. 그것은 ‘사라지는’의 우발적 안타까움을 너무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사라지는 것은 필연적일지라도 안타까움은 우발적이다. 나를 안타깝게 하는 것들은 어디까지나 예측할 수 없고 지시할 수 없다. 나는 시공의 무한 스펙트럼 위에서 혹은 아래에서 갑자기 슬퍼지고 외로워지고 우울해진다. 안타까움은 우발적이어서 더욱 안타까운 것이다.

  

가령 최혜영의 「그것은 인생」(1984) 같은 노래는 양자 중첩(Quantum Superposition)처럼 나의 시공의 좌표를 갑자기 35년 전 울산 대일로 순간 이동시킨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노래를 따라 불렀듯 뜻밖의 순간 내 기억의 심연에서 떠올라 알 수 없는 안타까움에 빠져들게 만들어 버린다. 「그것은 인생」과 1984년은 아버지의 부재와 가난과 주눅듦과 용기 없음과 슬픔과 아픔이 교차하는 '우울한 청춘'의 원인을 해석하는 일종의 디코드(decode)였던 까닭이다. 그때 나는 찬란한 청춘의 시간이 아니라 부재와 결핍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고, 최혜영은 그 앳된 목소리로 나를 호출한 것이다.

  

  

     아기 때는 젖 주면 좋아하고, 아하
     아이 때는 노는 걸 좋아하고
     저 가는 세월 속에 모두 변해 가는 건
     그것은 인생
     - 박건호 작사ㆍ김재일 작곡, 「그것은 인생」 중에서

  

  

하지만 결코 대단하지 않다. 내게서 ‘사라지는’ 것들은 익숙하고 편안하고 평범한 이름들, 얼굴들이다. 갑남을녀 혹은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이다. 초등학교 때 이미 초등학생의 키를 훌쩍 넘긴 키다리 행진이, 체구는 평범해도 동네 제일의 악동 현욱이, 이름이 같아 억울하게도 쌍둥이 취급을 당한 야음삼거리의 재홍이, 출중한 문재(文才)를 미처 펼치지 못하고 떠난 재경이와 경섭이, 미곤이 형, 내창이 형, 재만이 형, 그리고 아직 어린 아이들 둘을 두고 떠난 진택이. 짧게는 십여 년, 길게는 사십여 년을 만난 적도 없고 소식도 모르는 이들이다.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의 관점주의와 같이 깊고 어두운 골짜기에서 한 순간 나타나 밝게 빛나다 사라지는 얼굴들. 관점은 한때 밝게 빛나는 것들의 묶음, 나는 그들과 함께 순간들을 겪으며 누리며 살아왔다. “화요일 오후, 아니면 일요일 오후에는 서울에 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 부탁한 원고는 水요일날 열심히 보도록 할게. 그간 몸 건강해라." 곱슬머리 장발의 현이 형은 어느 날 새벽에 일어나 이런 편지를 쓰고 떠났다. 마포 공덕동 옥탑방에서 그와 나는 진실한 한 순간을 함께한 뒤 서로의 일상에서 사라져 갔다.

  

이름들과 얼굴들은 ‘사라지는’ 것일지는 몰라도 결코 완전히 없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최혜영의 노래 한 소절만으로도 그들은 순간 되돌아왔다. 그들의 눈빛, 목소리, 말과 행동까지 오롯이 되돌아왔다. 그래서 너무 생생하고 그런 만큼 더욱 안타까웠다. 기억이란 생존의 도구일 뿐만 아니라 속수무책의 아픔의 원인인지 모른다. 「그것은 인생」은 사라지는 이름들과 얼굴들만 호출한 것이 아니다. 그날의 하늘과 바람, 그 시절의 냄새와 맛과 분위기까지 불러냈다. 탈색된 스틸 사진처럼 혹은 도수가 맞지 않는 안경처럼 흐릿하지만 분명 그것은 1984년 어간의 모습이었다.

  

“무(無)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은 ‘없음’이란 “우리가 찾고 있는 것, 우리가 원하는 것,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없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했다(「가능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 『사유와 운동』, 1934). 우리의 바람에 반해 ‘없는 것’이지 ‘무’는 실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에게 우리의 실재 세계는 오직 충만한 지속이다. 이 세계에 진공이란 없다. 단 한 순간도 없음은 없다. 베르그송은 존재에 대하여 부존재를 상정하는 것 자체가 논리적 자기모순이며 형이상학적 불안의 기원이라고 했다. 발상부터 오류라는 지적이다.

  

그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라지는’ 것들은 실제로 내게 ‘없음’이 아니다. 그들은 지금 내 곁에 없지만 앞으로도 영원히 내 곁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그들이 내 곁에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내 바람이 충족되지 않는 만큼 그들은 언제나 내 곁에 있을 것이다. 바람의 不충족이 ‘사라지는’ 것들을 끝까지 붙들어 매는 것, 바로 ‘그것이 인생’인지 모른다. 그리고 시는 그런 부재와 결핍과 상실 속에서 태어나는 것인지 모른다.

  

만일 내가 여전히 시를 적을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저 1984년 어간의 ‘우울한 청춘’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의 부재와 가난과 주눅듦과 용기 없음과 슬픔과 아픔이 교차하는’ 가운데 살아남기 위해서는 시라도 있어야 했다. 시는 우선 나의 탈출구였고 해방구였고 구원이었다. 인간이 ‘바라는 존재’인 만큼 시는 영원히 인간 곁에 있을 수밖에 없고, ‘없음’도 없고 ‘사라짐’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우리의 ‘바람’에 감사하자.

  

  

  

[입력 : 2019-06-27]   김재홍 기자 more 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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