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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산책을 꿈꾸며

“바람 부는 봄날의 시간을 소중하게 만드는 것은 오직 진실을 바친 시 한 편에 있음을”

글  김재홍 문화부장 겸 문화사업본부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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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츠 갑순이의 아들 해방이가 있었다. 발가락이 여섯 개인 육발이 강아지였다. 삼겹살에 소주를 발라주면 곧잘 핥아 먹던, 아직 어린 주인을 너무 따르던 강아지였다. 30년 전 해방이는 배고픈 문청(문학청년)의 자취방에서 외로움과 허기를 달래주던 일종의 플라시보(placebo) 장치와 같았다. 아니다, 배고픈 주인이 아니라 게으른 룸펜의 얼굴과 손과 발바닥을 밤마다 닦아주던 따뜻한 물수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해방이는 주인이 컵라면을 끓여 먹는 옆에서 당당하게 참치 캔을 땄고, 주인이 밤새 맹물로 쓰린 속을 달랠 때 뜨듯한 우유를 마실 줄 알았다. 해방이는 가끔 시 세미나실 청강생이었고, 소설 세미나실 옆 잔디밭에서 학구열을 불태우기도 했다. 해방이는 지평을 넓혀 청춘남녀 연애사업의 촉매제 역할도 했고, 대취한 술꾼들을 단속하는 순라군이기도 했다. 강아지 때부터 성견이 될 무렵까지 해방이는 단연 촉망받는 문청이었다.

    

마치 해방이의 현신과도 같이 갑자기 나타나 길을 잡아 주었다.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이 괴생명체는 느닷없이 나타나 오랜 동안 정든 주인과 개처럼 앞서거니 뒤서거니 고개를 올랐다. 한참 앞으로 뛰어갔다가 뒤돌아 달려오기도 했고, 괜히 내 주변을 한 바퀴 돌아나가기도 했다. 그렇게 이름도 모르는 그놈과 함께 고개 하나를 넘어 갔다가 돌아왔다. 예버덩과 마주하고 있는 선계마을에서 월현2리를 잇는 산길이었다.

    

개는 30년 전 해방이와 같이 내게 한 마디 말도 해 주지 않았지만, 나는 안다. 그때나 이제나 변한 건 없다는 것을. 고개 넘으면 또 다른 고개가 나오고, 마을을 지나면 다시 마을이 나타난다는 것을. 시를 적고 나면 다음 시를 적어야 하고, 시집을 내고 나면 다시 시집을 내야 한다는 것을. 모든 시는 언제나 처음이라는 것을. 모든 만남은 첫 순간이 있었다는 것을. 그러므로 만남은 이미 헤어짐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한 달을 기약한 ‘예버덩’(古坪)에서의 생활도 이제 정말 막바지에 이르렀다. 이틀 후면 치악산 자락 횡성군 강림면에 자리한 문인들의 작업실 ‘예버덩문학의집’을 나서서 서울로 간다. 시집 원고 정리와 논문 쓰기를 목적으로 한 일상 탈출의 엑소더스(exodus)와는 별개로 내게 많은 ‘처음’을 선물한 예버덩을 떠난다. 단연 가장 큰 처음은 물론 오롯이 내게 주어진 30일간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다시 내게 이런 한 달이 주어질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기로 한다.

    

이제 믿음을 말한다.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으로 지낸 한 달을 뒤에 두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믿음은 오직 믿는 일밖에 할 수 없는 사람들의 에너지원이다. 닥친 어려움을 이겨내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믿음에는 근거가 필요하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나 믿음을 말한다. 이번에 정리한 시집 원고가 어떤 모습으로 나올지 궁금하다. 미처 완성하지 못한 논문은 장차 어떤 실체를 드러낼지 궁금하다.

    

주인을 너무 따르던 해방이는 그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필사적으로 좇아 나오는 개를 생각해 목줄을 고무줄로 바꾼 탓이었다. 해방이는 고무줄을 끊고 주인의 체취를 따라 대로까지 나섰다가 그만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해방이는 많은 문청들의 바람과 달리 결코 이 세상의 해방을 앞당기지는 못했지만, 30년 동안 자신을 생각해 주는 인간 하나는 남겼다. 떠나도 떠나지 않은 해방이처럼 이 바람 부는 봄날의 시간을 소중하게 만드는 것은 오직 진실을 바친 시 한 편에 있음을 다시 깨닫는다.

  

  

  

[입력 : 2019-03-27]   김재홍 문화부장 겸 문화사업본부장, 시인 more 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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