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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기념재단, ‘안익태 심포지엄’ 3월 29일 국립중앙박물관서 개최

“인류애·형제애의 정신이 안익태 음악의 최종 목표였다” “한 인간에 대한 평가를 흑백으로 구분할 수 없어...단순화시키면 역사 왜곡 일어나”

글  김성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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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기념재단(이사장 차응선)이 3월 29일 오후 2시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에서 ‘안익태 선생의 예술성과 역사적 업적에 대한 평가 및 재조명’ 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한다. 연주자를 거쳐 세계를 무대로 지휘자와 작곡가로 활동한 안익태 선생에 대한 예술적 가치와 역사적 업적에 대해 재조명하는 자리다.

 

권주용 신성대 교수의 사회로 진행되는 이날 심포지엄에는 전정임 충남대 교수, 허영한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임종권 한국국제학연구원장, 김승열 고전음악평론가 등이 패널로 참석한다. 전정임 교수는 ‘작곡가 안익태,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 임종권 원장은 ‘안익태 선생에 대해 제기된 친일의혹에 관하여’라는 주제로 발표한다.

  

안익태 선생은 애국가를 작곡한 세계적 음악가다. 하지만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지 못하는 요즘, ‘안익태’에 대한 기억이 뇌리에서 멀어져 가는 현실은 음악계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인 최초로 세계적 교향악단을 움직인 지휘자, 한국인 최초로 외국 음악 전문출판사에서 작품집을 낸 작곡가, 한국인 최초로 우리 가락을 유럽과 미국에 알린 음악인이었음에도 그에 대한 평전(評傳)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다.


1976년 신문기자 출신인 김경래씨가 안 선생의 구술(口述)을 바탕으로 《안익태》(태극출판사)를 냈지만 내용상 부정확한 게 많다. 생전 안익태 선생이 사실관계를 정확히 기억해 내지 못한 것들이 책에 그대로 담긴 탓이기도 하다.
 
그나마 전정임 충북대 교수가 1998년에 《안익태》(시공사)를 내면서 일부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았다. 전 교수는 “개정증보판을 내려고 했지만 자료 입수의 어려움과 출판사 사정 등으로 새 책을 출간하지 못했다"고 했다. 2007년에는 안익태 선생의 친일(親日) 행적 논란에 초점을 맞춘 《잃어버린 시간 1938-1944》(이경분 著·휴머니스트)가 나오면서 ‘안익태’의 관심과 입지는 더욱 줄어들었다.
  
세간의 무관심과 음악계의 ‘홀대’에도 허영한(許英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25년 넘게 안익태 선생의 생애를 추적, 연구해 왔다. 그는 1998년부터 음악 학술지를 통해 안익태 선생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꾸준히 알려 왔다. ‘안익태 선생에 대해 허영한 교수를 능가할 사람은 없다’는 평가를 받는 허 교수는 1990년대 초부터 인간 ‘안익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의 말이다.
     
“애국가를 작곡한 분인데 국내 음악학자들조차 관심이 없다는 단순한 이유에서 출발했습니다. 생애 대부분을 외국에서 보내다 보니 국내에는 관련 자료가 많지 않았고, 오히려 외국에 자료가 흩어져 있어 연구에 많은 지장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확보한 자료를 종합해 보면 안익태 선생은 항상 완성도 높은 음악을 목표로 살았던 분입니다. 그는 지독할 정도로 연습을 많이 한 음악가였습니다. 손님이 그를 찾아와도 첼로를 연습할 때나 지휘 공부를 할 때면 끝날 때까지 몇 시간씩 기다리게 했습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체류할 때 교류했던 일본인 친구의 일기에는 ‘안익태는 하루 종일 음악만 하는 사람이다’고 적혀 있기도 합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가 1936년 2월 발간한 ‘애국가’ 표지와 악보.

 

학계에서 안익태 선생에 대한 논란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애국가가 불가리아 민요(民謠)를 표절했느냐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친일(親日) 행적 부분이다.
   
먼저 애국가 표절시비는 1964년 국내에서 열렸던 ‘제3회 국제음악제’에 초청됐던 불가리아 지휘자 피터 니콜로프에 의해 처음 제기됐다. 그의 뒤에는 당시 안익태 선생을 시기했던 일부 국내 음악인들이 있었다. 표절시비 논란은 1976년 국내에 다시 이슈가 됐고 마침내 국가를 새로 제정해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결국 당시 연세대 음대 작곡과에 재직 중이던 공석준 교수가 애국가를 분석한 후 “애국가는 세계 어느 국가(國歌)에도 손색이 없는 독창적이고 위대한 작곡임에 분명하다"고 결론을 지으며 문제는 일단락됐다.
 
간간이 일부 음악인에 의해 새로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1997년 김영삼(金泳三) 정부가 “애국가는 일본 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 민족과 함께 영광과 수난을 같이하면서 자연스럽게 국가로 자리 잡았다. 애국가가 법률로 공식 지정되지 않은 것은 결코 현행 애국가의 곡조나 가사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고 밝히면서 논란의 종지부를 찍었다.
     
허영한 교수는 “1960년대에 처음 제기됐던 애국가의 불가리아 민요 표절 논란은 이제 음악계에서 완전히 일단락됐다. 그러나 친일 논란은 지금도 여전하다"고 했다. 그는 안익태 선생과 일본의 관계에 대해 사실을 근거로 한 연구논문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유럽으로 건너간 안익태의 국적은 일본이었. 다시 말해 일본인 작곡가였고, 일본인 지휘자로 알려진 것이다. 물론 안익태 선생은 인터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을 한국사람이라 밝혔다.

  

2차 대전은 안익태의 음악인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안익태 선생은 1938년 그의 스승 에르뇨 도흐나니(Ernest von Dohna'ni)의 도움으로 헝가리 부다페스트 오페라 오케스트라를 지휘했고, 이듬해에는 헝가리 정부의 장학금을 받으며 리스트음악원에서 세계적인 지휘자 졸탄 코다이(Zolta'n Koda'ly)와 같이 공부했다. 그런데 일본과 헝가리가 문화교류를 맺으면서 안익태의 활동에 제약이 가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허영한 교수의 말이다.
   
“유럽으로 건너간 안익태의 국적은 일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일본인 작곡가였고, 일본인 지휘자로 알려진 것이죠. 물론 안익태 선생은 인터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을 한국사람이라 밝힙니다. 그러나 전쟁이 격화되던 1940년부터는 그의 이름이 ‘에키타이(익태의 일본식 발음) 안’으로 소개됩니다. 일본과 헝가리의 관계가 작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안익태 선생은 비록 자신의 이름이 일본식 발음으로 표기됐지만 자신의 성(姓) ‘안(安)’은 끝까지 지켜 냈습니다. 일본의 압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는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안익태 선생이 당시 유럽에서 일본인 작곡가, 일본인 지휘자로 알려졌음에도 1940년까지 ‘한국환상곡’을 고집하며 지휘했다는 점이다.
  
허영한 교수는 “친일 여부에 대해 짧게 답해야 한다면 그처럼 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답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그는 “불행히도 우리 현실은 친일 여부를 학문적 성찰의 결과로 말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이에 대한 언급은 자동적으로 정치적 발언으로 취급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 인간에 대한 평가를 흑과 백으로 뚜렷이 구분하는 행태에 저는 동의할 수 없다. 인간으로서 삶의 여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단순화시키면 역사의 왜곡이 일어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급한 성격을 가진 안익태 선생은 음악에 관한 한 고집불통이었다고 한다. 영국 런던 로열 페스티벌홀에서 한국환상곡을 연습하는 도중 자신의 매니저와 다투는 장면이다.

 

여러 자료를 검토해 보면 안익태 선생은 부당한 권위에 대해 쉽게 굴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가 1930년대 초 미국 유학 시절 이민당국에 의해 추방될 위기에 처했을 때 “추방당하느니 차라리 내 발로 직접 떠나겠다"고 큰소리친 것이나,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있을 때 안익태의 일본인 친구가 자신의 일기장에 ‘안익태가 문제를 안 일으켰으면 좋겠다. 일본 영사관 측과 트러블이 안 생겼으면 좋겠다’고 적어 놓은 것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1944년 태평양전쟁이 극에 다다를 즈음, 프랑스에 머물던 안익태는 당시 중립국이었던 스페인으로 몸을 피한다. 그곳에 잠시 머물다 미국으로 건너가 최종적으로 한국에서 살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스페인 여성 ‘로리타 탈라베라’와 결혼하면서 결국 스페인 마요르카에 완전히 정착했다.
   
안익태 선생은 1947년부터 1959년까지 마요르카 교향악단(70여명으로 구성)의 상임지휘자로 활동했다. 그는 베토벤 교향곡 3번, 5번, 7번을 자주 연주했는데 그중에서 5번 ‘운명’을 가장 많이 무대에 올렸다. 그는 베토벤 작품 외에 차이콥스키 교향곡과 드로브자크 교향곡도 많이 연주했다.
  
당시 지휘자 안익태는 마요르카 교향악단원들을 조련하면서 혹독하게 연습시키기로 유명했다고 한다. 성격이 불같은 안익태 선생은 제대로 연주하지 못하는 단원들을 혼내 단원들이 우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스페인에 거주하면서 안익태 선생은 1945년 광복을 맞는다. 그러나 그는 1950년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 전까지 무국적(無國籍) 상태에 놓인다. 세계적 음악가였던 그가 5년 동안 국제 미아(迷兒)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한국 방문은 1955년에야 성사됐다.
   
1955년 한국을 처음 방문한 이후 그는 불행히도 국내 주류 음악계 인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허 교수에 따르면, 안익태 선생은 성격이 매우 급하고, 음악에 관한 한 자기 중심적이며 고집불통이었다고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한국에서 국립오케스트라를 만들겠다는 그의 꿈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안익태 선생은 자신의 조국으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고 스페인에서 한국인으로 살다가 생(生)을 마감했다.
   
안익태 선생에 대해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점은 그가 6·25전쟁을 전후로 ‘한국의 음악 외교관’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전쟁이 끝난 1953년 직후 우리나라는 미국을 비롯한 우방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때 안익태 선생은 아프리카 대륙을 제외한 모든 대륙을 돌아다니며 한국환상곡을 지휘, ‘한국 알리기’에 열정을 쏟았다.
   
안익태 선생의 삶을 되돌아 볼 때, 그의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국내 음악계가 그에 대해 무관심한 것은 국내에 ‘안익태 제자들’이 없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겠지만 건국(建國) 이후 국내 음악계가 형성되던 초창기에 국내 음악인들과 안익태 선생이 상당히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점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자기주장이 강했던 안익태 선생의 ‘고집’은 국내 음악인들로 하여금 그를 불편한 ‘존재’로 각인케 했고, 결과적으로 그가 활동할 수 있는 ‘국내적’ 공간이 마련될 틈이 없었다. 표절·친일 논란에 휩싸이게 된 것도 여기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허영한 교수는 “안익태 선생은 음악인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살아온 분"이라고 했다. 그의 말이다.
     
“현재 한국인으로서 세계에 이름을 날리는 음악인이 많지만 1930~40년대 당시 안익태 선생의 명성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안익태 선생에 대한 몇몇 평가가 있지만 정치와 이념, 또 국경을 넘어선 세계적 음악인으로서 그를 재평가해야 합니다."

     
안익태 선생에 대한 몇몇 평가가 있지만 정치와 이념, 또 국경을 넘어선 세계적 음악인으로서 그를 재평가해야 한다.

 

친일(親日) 여부를 떠나 친일 논란만 있어도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정부 차원에서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고 있는 상황에서, ‘안익태 선생’을 연구하고 토론하는 자리를 개최하는 것 그 자체가 의미 깊다.
  
이제 우리는 안익태 선생의 음악관(音樂觀)을 제대로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1955년 모국을 처음 방문한 안익태 선생은 국내 오케스트라단을 통해 애국가와 한국환상곡을 연주했다. 당시 소감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부인 로리타 안 여사가 생전에 쓴 《나의 남편 안익태》(청구문화사·1974)의 한 대목이다.
    
“여보, 난 살아 있다는 사실에 정말 고마움을 느꼈소. 산다는 것은 정말 기쁜 일이고, 언제나 고생을 참고 견디면 이에 대한 보상이 있게 마련이거든. 당신도 내가 한국에서 애국가와 한국환상곡을 지휘했다는 사실이 내게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겠지."
      
안익태 선생은 모국(母國)에서의 첫 연주 직후 일본으로 건너가 음악회를 연다. 이때도 한국환상곡을 연주하는데 일본인 합창단이 한국말로 우리의 애국가를 부르는 것을 직접 지휘한다. 일제 치하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안익태 선생은 일종의 ‘복수심’과는 차원이 다른 뜻을 피력한다. 《나의 남편 안익태》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한 것은 말이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속된 것이 아니고 바로 이런 것이었소. 즉 음악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뜻을 합치게 함으로써 모두가 한 형제처럼 서로 사랑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것 말이오. 내가 그들 머리 앞에서 군도(軍刀)를 휘둘렀더라면 아무도 노래를 부르려고 하지를 않았을 거요. 그러나 지휘봉을 드니까 두말없이 노래를 불렀거든. 그것도 아주 열성과 애정과 성실성을 가지고 말이오. 여보, 이제 내 말뜻을 알아듣겠지. 결국 두 나라는 음악을 통해 형제국이 된 거요."
    
안익태 선생의 음악관은 ‘음악은 인류화합의 도구’라 요약할 수 있다. 그는 “음악은 국제적인 언어이며 나라의 경계를 넘어 인간을 하나로 뭉치게 한다"고 늘 강조했다. 그의 음악관(音樂觀)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안익태》(시공사·1998)를 출간한 전정임 충북대 교수는 “인류애, 형제애의 정신이 바로 안익태 선생이 음악을 통해 이루려 했던 최고의, 최종의 목표였다"고 했다.
    
안익태의 음악관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현실을 직시한 예술가 정신’이다. 재능이 없는데도 허영심에 빠져 예술을 하는 것은 국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34년 4월 18~19일 이틀간 연재된 《동아일보》 기고문의 일부분이다.
 
“일시적 허영심에 의해 자기에게 적합하지도 않고 또 재능도 없이 음악가가 되고자 인생의 최귀(最貴)한 수양(修養)시기에 조선에 필요한 다대(多大)한 금전을 무의의(無意義)하게 낭비하는 것은 도저히 합당치 아니한 줄 아는 바입니다.(중략) 적합한 제 조건이 없으면 자기에게 적합한 다른 과학으로 전진하여 개인적으로 유의의한 생애를 지내고 아울러 동포에게 유효한 봉사를 하기 바라는 바입니다.(중략) 최종은 예술가적 정신, 즉 음악적 정신인데 기악이나 성악, 작곡 등에 대해 극히 세밀한 점에까지 전문가로서 양심의 감각이 있어야 합니다.(중략) 위대한 예술가는 위대한 천재와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인 것을 여러 음악사(音樂史)가 증명하는 바입니다."
 
 

 

[입력 : 2019-03-18]   김성훈 기자 more 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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