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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불임의사는 결국 환자의 마음을 치료하는 것”

-- 부산 세화병원 이상찬 원장 인터뷰

글  이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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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승주 기자

● 캐릭터 풍선 직접 불어주는 자상한 의사
● 불임의사는 임신을 도와주는 조력자일뿐
● 19년 전, 대리모 공개모집을 신문광고로 내다
● 부산경남지역 최초로 정자은행 운영에 박차 가해
● 불임의사들은 모든 시술에 정성과 혼을 쏟아야 돼
● 밥 잘 먹고 열정적인 여성이 임신 잘 한다
● 의술에는 일 더하기 일이 2가 될 수 없어

이상찬(李相燦)
본관 경주. 1952년 서울출생. 부산대 의대 졸업. 現 부산 세화병원 원장

 

   
 (위) 부산 동래구 온천동에 위치한 세화병원. / (아래) 세화병원의 터줏대감 직원 4인방


“원장님 자랑 좀 해도 되지예? 우리 원장님이 억수로 자상하십니더. ‘아톰아빠’라는 별명이 딱 어울리는 분이라예. 언제 사 놓았는지 몰라도 초코파이를 들고 있다가 자상하게 나눠주실 때 보면 딱 ‘아톰아빠’입니더. 억수로 귀여우시거든예. 원장님은 환자들에게 줄 선물을 직접 고르러 다니는 분으로 유명합니더. 어렵게 임신한 분이 출산 후에 인사차 방문을 많이 하거든예. (그 난임여성이 낳은) 애들에게 직접 풍선을 불어주는데, 그냥 불어주는 게 아니라 아이들이 좋아하는 캐릭터 모양의 풍선을 불어줍니더.

임신이 잘 되는 날이 있거든예. 그런 날에는 피자 몇 판씩 돌리면서 파티하라고 해주십니더. 제가 이렇게 말하니까 우리 원장님이 호탕하고 돈 잘 쓰는 의사쌤 같지예? 아닙니더. 억수로 검소하시거든예. 나이든 남자분이 우째 그렇게 디테일하게 신경 써주시는지, 다른 의사쌤들은 따라오질 못할낍니더.” (병원 관계자)


안 되면 내탓이고

지난 7월 3일, 기자가 부산까지 KTX를 타고 도착해서 찾은 곳은 동래구에 위치한 ‘세화병원’. 지난 10년간 통계를 봤을 때 부산 경남지역에서는 시험관아기 시술을 가장 많이 한 곳으로 소문이 자자한 불임전문병원이다.
 

 

   
 지난 7월 19일에 부산 웨스틴조선호텔에서 개최한 <2014 세화 심포지아> 한 장면 


입소문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불임시술을 한지 20년째 접어들었다는 역사 외에도 ‘세화 심포지엄’, ‘난임부부 건강교실’ 등 소위 출산을 장려하는 다양한 행사를 매년 꾸준히 열어 경남 부산 지역 내 저출산 문제 해결에 앞장서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러시아와 몽골, 중국인들까지 불임시술을 받기 위해 찾아올 정도로 해외에까지 알려져 있다.  

기자가 세화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만난 사람은 ‘난임전문 코디네이터 상담실장’이라는 직함의 여직원 현필선(49) 씨였다. 자신을 ‘세화병원 터줏대감’이라고 소개하는 현씨는 “원장님에 대해서는 제가 모르는 것 빼고 다 압니다”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부산사투리가 여간 다정다감하게 들리지 않았다.

취재를 다니면서 참으로 드문 일 중 하나가 가족이 아닌 직원이 진정성을 가지고 수장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것이다. 그녀의 경우 A4 용지 두 장에다 ‘원장님의 장점’이라는 주제의 글을 작성해서 기자에게 건네줄 정도였다. 

현씨 왈, “한정된 인터뷰 시간만으로는 우리 병원장님의 장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것 같아서 직원들이 모여서 장점 기억하기 회의를 했다”는 것. 그것도 강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불현 듯 궁금했다. 세화병원의 원장님은 도대체 어떤 분일까.

세화병원은 아담하고 아늑한 인테리어가 돋보였다. 1층 건물 중간에 화단이 조성되어 있었고, 2층과 3층에서 아래 화단이 투명유리로 내려다보였다. 또한 건물 안에 직원식당이 있어서 전 직원이 같이 밥을 먹는 공간이 꾸며져 있었다. 규모로 보나 시설로 보나 수도권에 있는 유명한 불임병원 어떤 곳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만한 시설이었다.

 

   
 

세화병원을 이끄는 이상찬(61) 병원장. 이제 막 수술을 끝냈다며 달려온 그의 모습은 직원의 귀띔이 아니었어도 60~70년대 우리나라에서도 인기 있었던 일본 만화영화 ‘우주소년 아톰’에 나오는 박사님이 떠올랐다. 둥근 얼굴과 선한 눈매, 양 옆머리만 있는 친근한 인상 때문이었다.

이 원장은 수술가운을 미처 벗지 못한 채 왔다면서도 차분하고 자상한 미소로 맞아주었다.

깊고 굵은 음색이었다. 다소 느린 말투가 환자 입장에선 무척이나 신중하게 들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치 ’느림의 미학’ 강연장의 연사를 보는 듯 했다.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생명 앞에 선 의사의 말투라면 무거운 듯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다 싶었다.

▶ 불임의사는 한 가문에 자식 만들어주는 일이라서 보람이 꽤 있을 것 같습니다.
“글쎄… 암수술이야 뭐, 잘라내면 끝나는 건데, 불임환자는 한 달 뒤에 Yes냐 NO냐가 나오잖아요. 매일 괴롭지요. 안 되면 내 탓(의사)이고…”

▶ 불임시술은 의사가 환자에게 해줄 것이 없다는 말로 들립니다.
“시술이야 뭐 쉽죠. 난자채취해서 체외에서 수정시키고 넣어주면 되니까. 그걸 놓고 불임의사 잘 하네 못하네 해선 안 되고. 결국 환자의 마음을 치료해야 하는 것 같아요. 요즘 부쩍 느껴요. 불임의사란 직업은 산부인과 의사와 좀 달라요. 내 스스로가 좋아야 하지, 안 그러면 못 해요. 임신을 시켜야 한다는 부담이 있어서… (불임의사로 사는 걸) 천직으로 알아야 힘들지 않게 할 수 있어요.”

▶ 산부인과 의사로 불임쪽은 생소했을터인데, 어떻게 선택하게 되었습니까.
“난 원죄가 있어서…”

▶ 원죄라니요?
“1983년에 산부인과 전문의 되고 나서 부산대 교수로 발령이 났어요. 7월에 발령이 나니까 몇 달간 쉬어야 했어요. 그때 내 주임교수가 가족협회에 가서 일하고 있어라 하더라고. 그때 가족협회에서 ‘아들 딸 구별 말고 한 명만 낳자’고 캠페인 할 때였어요. 혹시 기억 나세요? 산아제한 캠페인을 나라에서 대대적으로 했었어요. 전 거기에 가서 나팔관 묶고 정관수술 해줬어요. 하루에 백 명도 더 잘라냈어요. 한번은 결혼도 안한 총각이 오더라고. ‘왜 총각이 정관수술을 하려고 하느냐?’라고 물었더니 ‘나중에 다시 풀면 되잖아요. 해주세요.’ 하더라고요. 예비군 훈련 안 받으려고 그러는 거죠. (그때 그 시절에는) 예비군 훈련에 가서 정관수술을 받으면 훈련을 빼주었거든요. (피임시술을) 그때 내가 너무 많이 해줬어요. 그 원죄가 있어서 회개하고 지금 애를 만들어주고 있잖아요.(웃음)”

▶ 정말 그것 때문에 불임의사가 되신 겁니까.
“정말입니다. 난 그 원죄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있어요.”

▶ 지방대 나와서 불임의사 되는 길이 쉽지 않았을텐 데요.
“80년대 중후반에 부산대에서 불임(생식내분비학)을 전공으로 하는데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거라. 불임환자가 와도 해줄 게 없어. 그래서 서울대 병원으로 공부하러 갔어요. 93년도에 서울대 병원에 갔더니 교보생명 회장이신 신창재 선생님도 산부인과 교수로 있었고, 우리나라 최초로 시험관아기 시술 성공시킨 장윤석 교수님도 계시더라고요. 서울대병원에서 나를 펠로우로 받아줘서 불임시술을 좀 배울 수 있었어요. 임상경험을 많이 쌓고 싶어도 그 시절에는 시험관시술이 흔하지 않았던 때라서 대상자가 많지 않았어요. 그저 저널 찾아가며 공부할 수밖에 없었어요. 시험관아기 시술 경험을 더 해보려고 미국까지 갔던 거예요.”

▶ 그때 그 시절에 교과서에 생식내분비에 대한 이론도 구체화되지 않았을 때인데, 의술을 익힌다는 것이 쉽지 않았겠습니다.
“그러게…  원죄가 있어서 사명감이 있었어요. 이걸로 먹고 살 수 있겠나 걱정이 되긴 하더라고요. 제가 미국 코넬대학에 배우러 갔었어요. 그 당시 이미 코넬대학에서는 불임시술을 많이 하더라고요. 임신율도 꽤 괜찮았고요. 1년 정도 시간이었지만 저에겐 큰 공부가 되었어요.”

▶ 첫 개원은 불임시술뿐만 아니라 분만을 하는 병원으로 여신 거지요? 분만병원을 하시다가 왜 접으셨습니까.
“부산에 와서 분만병원과 불임병원을 같이 시작했는데, 쉽지가 않았어요. 솔직히 당시로서는 불임으로 먹고 살 수 있을까 걱정이 되더군요.산과를 하려면 이천평 이상 규모가 되어야 산모를 받을 수 있겠더라고요. (분만이) 힘들고 안 힘들고를 떠나서 제대로 시술하고 산모 받고 하려면 어쩔 수 없더라고요. 솔직히 제가 불임시술로 임신시킨 산모는 내가 애를 받아주고 싶었거든요. (불임시술과 분만병원을 같이 한다는 것이) 쉽지 않더라고요. 결국 불임만 하게 되었어요. 10년째 불임시술만 열심히 하고 있어요.

▶ 부산에서 세화병원이 시험관아기 시술을 많이 하는 병원으로 유명한데, 병원 경영의 노하우가 있을 듯 합니다.
병원을 운영하는 데에는 운이 따라야 해요. 도와주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모든 것이 인연을 잘 만나야 하는 것 같더라고. 난 정말 사람을 참, 잘 만난 것 같습니다. 우리 병원 직원들이 내 병원이라고 생각하고 뛰어줬어요.” 
 

<2편에서 계속>

[입력 : 2017-02-19]   이은영 기자 more 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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