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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지방대 출신으로 스카이 의피아에 맞서 불임의사로 살아기가 쉽지 않았어요”

- 시엘 병원, 최범채 원장 전격 인터뷰

글  이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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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승주 기자

● 한국에서 非서울대 非연세대 의대 출신은 불임의사 되기 힘들다
● 인턴 때 흰 가운 네 벌 준비한 치밀한 뚝심
● 학회장에서 외국 석학에게 손들고 질문했다가 망신당해
● 환자들까지 ‘어느 의대 나오셨어요?’라고 따지고 들어
● 몽골에서 더 유명한 불임의사가 되기까지 비화
● 독도문제, 거론하는 독특한 의사
● 면역처방 너무 과하면 없던 자가질환이 생길 수 있어
● 때로는 ‘진실’보다 환자부부의 행복을 더 우선시할 수 있어야
● 진정한 명의는 환자의 고통을 읽어내는 연기자라야

최범채(崔凡彩) : 본관 화순. 1960년 광주 출생. 조선대 의대 졸업(1985년). 영국 본홀 불임클리닉, 연수(1994년). 하버드의대 브리험 여성병원(1995~1997년) 연수. 성균관 의대 삼성제일병원 산부인과 교수, 국내외 불임학회 학술상 8회 수상, 現 시엘병원 병원장(광주광역시 소재)

   
▲최원장은 몽골 정부의 공식 보건 자문 의사이며 현지 대학병원 산부인과 스텝들에게 불임시술을 가르치고 있다. 
 

몽골에서 더 유명한 의사

최 원장은 하버드의대 브리험 여성병원에서 생식면역학에 관한 공부를 해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지금까지 100여편의 논문을 썼다고 한다. 지난 2002년에는 전 세계 대표적인 부인과 교과서인 노박(Novak)에 습관성 유산에 대한 내용을 당당히 기고해서 주목을 받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드물게 미국불임학회, 캐나다불임학회, 일본 불임학회에서 논문상을 수상한 바 있고, 국내 불임학회에서도 5차례 논문상을 수상했다.

이런 그에게 이색적인 감투 하나가 더 있다. 다름 아닌 ‘몽골 정부의 공식 보건자문의사’라는 직함이다. 최근에는 우즈베키스탄, 베트남, 중국, 러시아 등의 현지 대학병원 산부인과 스탭들에게 불임교육까지 하고 있다.

▶유학을 마치고 와서 힘들 게 취직한 J병원에 그대로 계시지, 왜 나오셨나요.
“대형병원 스탭 멤버로는 의사로써 야망을 펼치는데 한계점이 있겠다 싶었죠. 그때 집 기둥뿌리 하나 뽑아서 강남에서 불임클리닉을 하면 대박을 내겠다 싶긴 했었습니다. (웃음) 사실 고향으로 내려가겠다는 생각을 영국 본홀 불임클리닉에서 했었어요. (본홀클리닉이) 캠브리지에서 30분간 더 들어가야 했는데, 산길을 달리면서 ‘아! 불임병원은 산속에 있어도 유명하기만 하면 찾아오겠구나’ 싶더라고요. 고향에서 개원하겠다니 지인들이 말리긴 하더군요.”

▶J병원 출신인데, 병원 명을 전혀 다른 걸 쓰셨던데. 보통 J를 넣던데.
“제가 미국에서 생활을 해 보니까 차, 마리아, 제일, 삼성 같은 회사에 대해 인식을 못하더라고요. 국제적인 이름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창조와 사랑’이라는 뜻으로 Creation Love의 약자를 따서 CL이라고 정한 거에요. 주위에서 ‘혀도 안 돌아가게 시엘이 뭐냐? 빛고을 산부인과, 무등산 산부인과라고 하지.’라고 하더군요.”

▶년간 불임치료 시술 건수가 어느 정도인가요.
“난임시술을 20여 년간 했어요. 시험관아기시술, 인공수정시술을 합쳐서 2만 케이스 좀 넘게 한 것 같습니다. 저희 병원에서 한 달에 시험관아기 시술만 120케이스를 하고 있는데, 제가 시술경험이 많다보니 환자들이 자꾸 저에게만 몰려요. 제가 한 달에 90여건 하고 있습니다.”

▶타지에서 오는 환자도 많고 외국인 환자도 많기로 소문이 자자하던데요.
“(저희 병원에는) 40%가 타지에서 오는 환자들입니다. 전체로 봤을 때 외국환자가 10%~20%고요. 외국인 환자들이 꽤 많은 편이지요. 몽골 쪽에서 난임 부부들이 많이 옵니다.”

▶시엘 병원은 몽골에서 더 유명하다면서요. 몽골과는 어떻게 인연이 되었나요.
“서울에 송도병원의 이사장님이 대학 선배인데, 그분이 몽골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고향에 내려와서 분만까지 할 수 있는 산부인과를 개원 했지만, 너무 골치가 아파서 분만을 그만 두었더니 병원이 당장 망하게 생겼더라고요. 그러던 차에 그 선배님과 인연이 되었어요. ‘몽골이 부인과가 너무 열악한데, 와 봐라’고 해서 갔더니 너무 충격적이더군요. 의료가 정말 후진국 수준이었어요. ‘이 나라에 의료발전을 위해 뭔가를 해 줘야겠다’라고 생각이 들어서, 그때 마침 분만을 접어서 병원에 애물단지가 되어 있던 인큐베이터, 분만대 같은 기구들이 있었는데, (기구들을) 전부 몽골 국립모자보건 센터에 기증해 버렸어요. 돈으로 따지면 3만불 정도 될 겁니다. 그날 이후 몽골에 엄청 갔었어요. 여권에 도장을 찍을 데가 없을 정도로 왔다 갔다 했으니까요.”

▶몽골 쪽은 의료수준이 정말 낙후되어 있지요?
“20세기에 머물러 있었어요. 우리나라 70~80년대보다 못한 것 같더라고요. 의학교육이 제대로 안 되었기 때문에 의사들이 뭐가 틀렸는지를 모르는 겁니다. 가장 심각한 건 간염환자가 너무 많다는 거예요. (몽골 국민들 중에는) B형 C형 간염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많아요. 위생문제도 후진국 수준이지만 간염이나 질병에 대해 예방이 전혀 안 되는 게 문제더라고요. 두 번째는 성병환자가 너무 많았어요. 인구가 330만 명으로 우리나라로 치면 대구 부산 인구 밖에 안 되면서 땅 덩어리는 우리나라 20배 이상인 거죠. 영유아 의료관리시스템도 엉망이고, 임산부 기형아 검사 시스템이 허술해서 기형아가 너무 많이 태어나고 있었어요. 그렇다고 해서 국가가 그걸 책임지는 시스템도 아니었고요.”

▶몽골 쪽에 가서 강의도 많이 하셨다면서요.
“강의야 6-7차례 밖에 안 했고요. 몽골 쪽 의사들에게 의술 깨우치게 하려고 우리 병원에 데리고 와서 트레이닝을 시켰어요. 지금까지 10여 명의 의사들이 교육을 받고 갔습니다. 의료교육 수준이 높고 무엇보다 임상 경험이 많은 곳으로 한국만한 나라가 없을 겁니다. 한국은 의료수가(의료 기술료)가 싸고 의료보험이 잘 되어 있어서 병원 문턱이 낮잖아요. 한국의 병원에서는 환자를 많이 만날 수 있으니까 의사로서 경험을 풍부하게 쌓을 수 있겠다 싶어 제안을 했지요.”

▶몽골에서 한국으로 불임시술 받으러 올 정도라면 현지에서 부자이거나 특권층이겠어요.
“상위 10% 안에 드는 부부들이 많습니다. 몽골개척을 할 당시 광주 쪽 사람들이 저를 보고 웃었어요. 몽골 쪽과 연결이 된다고 해도 비행기 타고 오겠냐고. (비행기를 타고) 온다고 해도 서울에서 하지, 인천공항에서 광주까지 내려오겠냐고.”

▶그 걱정도 일리가 있는 것 같은데.
“뭘 모르면 그런 걱정을 할 수 있습니다. 러시아 몽골이나 중국쪽 사람들은 우리나라보다 땅 덩어리가 수십 배 더 크기 때문에 차 오래 타는데 이골이 난 국민들입니다. 인천에서 광주까지 300km 달리는 건 아무 것도 아닌 거죠.”


   
 ▲최원장 병원에 근무하는 외국인 간호사들.

병원의 이주여성

▶제가 알기로는 몽골은 인구도 적고, 유목민 피가 흘러서 가정을 이루거나 자식에 대한 간절함이 한민족에 비해 덜할 것 같아요.
“(몽골에는) 빈부차가 너무 큰 게 문제더라고요. 여자들은 사랑해서 결혼하기 보다는 자본을 따라 결혼해요. 미국인의 아이를 낳기도 하고, 영국인의 아이를 낳기도 하는 식이지요. 오랜 시간 동안 민족말살정책에 시달려서 그런가. 징기스칸의 후예라는 자부심이 사라졌더라고요. 한 나라의 ‘국민’이라는 주인의식이 많이 약해 보였어요.”

▶병원 관계자 중에 몽골인으로 보이는 간호사가 보이네요.
“병원 관계자들 중에도 몽골 출신이 여럿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온 이주여성들도 있고요. 제가 4년 전부터 직원의 10%는 외국인을 고용하겠다고 선언했어요. 병원 식구들이 처음에는 ‘말 안 통하는 외국인을 어떻게 병원 관계자로 취직을 시키냐’며 난리가 났었어요. 병원 코디네이터들은 상냥하게 말을 잘 해야 한다는 겁니다. (외국 여성을 병원에서) 막상 일하게 해 보니 환자들도 어눌한 말투의 외국인 간호조무사를 경계하고 무시하더라구요. 예를 들어서 ‘김경희씨’를 부르는데, 환자는 ‘김정희씨’로 들리는 식이였죠. 또 억양이 북한말 비슷하니까 거부감이 심했어요.”

▶환자에게 투약설명 등을 해야 할 간호사가 발음이 이상하면 환자들이 거북해했을 텐데요.
“(환자들에게) 제가 나서서 설득을 했죠. ‘나도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하버드 의대에서 언어 때문에 장애인 취급을 받았다. 우리 병원 외국인 직원들이 단지 언어가 정확하지 않아서 그렇지, 모두들 전문지식을 습득해서 문제가 없다’라고. 돌아서서 외국인 직원들에게 당부를 했어요. ‘TV를 많이 보면서 발음연습을 해라. 표준말 사용해야 한다. TV보는 것만큼 좋은 어학 공부가 없을 거다’라고요.”

▶독특한 의사십니다. 외국인을 병원 식구로 맞이하려고 생각하셨나요.
“(개원하려고) 광주로 내려오니까 지역에 이주민 여성이 정말 많더라고요. 전국에서 이주 여성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 호남이라고 합니다. 여긴 농촌지역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 사실 광주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인권도시라고 알려져 있잖아요. 실상은 그렇지 않았어요. 이주민 가정들은 인권의 사각지대였어요. 이주여성들의 상당수가 고학력자였지만 남편은 나이 많고 학력수준이 낮은 경우였고요. 상당수가 한국 농촌에 시집와서 인간 대접을 못 받으며 힘들게 살고 있더군요. 제가 외국에서 언어 때문에 고생한 경험이 있어서, 고향에 와서 이주민 한글학교에 후원금을 10년간 보냈어요. 그게 계기가 된 겁니다.”

▶의사보다는 사회운동가, 정치인 타입이신 것 같아요. 왜 의사가 되셨어요?
“본래 문학도였어요. 미술도 취미로 했었고, 서예도 곧잘 했고요. (대학진학을) 미대나 건축과로 가려고 했는데, 그때 마침 아버지가 아프셔서 병원생활을 오래 하셨는데, 병원에 가 보니까 의사선생님들이 대단하다 싶더군요. 의사가 입은 가운이 멋있어 보였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 같았습니다. (의대 진학하려고) 뒤늦게 공부에 불이 붙은 거죠. (웃음)”

▶의사인데 독도문제에 대해 신문에 칼럼도 쓰셨더군요.
“외국에 나가보니까 유명한 일식집 상호에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식 명칭)’가 많았어요. 전율이 막 오더라구요. 보스턴에서 ‘일식집에서 만나자’하면 ‘다케시마’라는 겁니다. 왜 이놈들은 일식집 이름으로 다케시마를 잘 쓰나 기분이 이상하더라고요. 저도 미국에 나가서 알게 된 사실인데, 일본 문부성에서는 오래전부터 제3세계 나라의 젊은 인재들을 선발하여 장학금을 주면서 교육을 시켰다더군요. 세계 각 국의 40~50대 엘리트 주류 중에는 일본 문무성 장학금 받은 분들이 꽤 많을걸요. 그들은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소리 없이 주장하고 있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독도 얘기 나오면 흥분만 할 줄 알지, 논리가 없잖아요. 저는 늘 독도문제가 거론이 될 때마다 한마디 하고 싶단 생각을 했었어요.”

▶사회적 문제를 놓고 칼럼을 쓰고, 개인 블로그까지 관리하신다니 대단합니다.
“3년 전에는 호남지역 사람들도 말 못하는 걸 제가 쓴 적이 있어요. 제목이 ‘님을 위한 행진곡이냐, 나를 위한 행진곡이냐’ 였어요. 5.18 영령들을 위한 노래를 자기 이해집단에 관련된 것에 이용하는데, 국민들이 좋아하겠냐고 했어요. 정치인들이 필요할 때마다 왜 그걸 부르는지 이해할 수 없었거든요. 광주 이미지 훼손한다고 생각합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이 아니라 나를 위한 행진곡이다 이놈아’라고 대놓고 썼습니다.”

최 원장은 “지식인이라면 일반 사람들이 미처 못 보는 것을 봐 줄 수 있어야 한다”며 “돈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충실하게 배웠으니 사회발전을 위해 어떡해든 기여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계속>
 

[입력 : 2014-07-21]   이은영 기자 more 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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