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대 의대를 졸업해서 J병원에 드디어 스탭으로 근무하게 되었으니 기쁘셨겠어요.
“별로 달갑지 않았어요. 1년간 펠로우만 하고 그만둬야겠다고 말했어요. 그 바닥은 의피아(동문선후배 연결고리)가 막강해서 스카이대학(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출신 아니면 스텝으로 선택되기가 쉽지 않았거든요. 당시 J병원 불임분과에 티오가 한명 밖에 없었는데 언감생심 제가 어떻게 스탭이 될 수 있겠냐고 말했습니다. 이사장님께서 ‘무슨 소리? 젊은 사람이 패기가 그리 없냐?’며 혼을 내시더니 병원장을 불러올리시는 겁니다. ‘산부인과 티오 1명에 1명을 더 추가해서 닥터 최를 뽑으라’고 한 거였어요.”

▶지방대 의대 출신으로 ‘의피아’라고 표현하신 그 판에서 의사생활이 쉽지 않았을텐데요.
“비하인드 스토리가 많고 많아요. (웃음) 한번은 국제학회가 J병원 주최로 서울 시내 호텔에서 열렸어요. 그 누구도 외국인 발표자에게 질문을 하지 않더군요. 맨 앞줄에 앉아 계셨던 J병원 오너가 자꾸 뒤를 돌아보시면서 스텝 중 누군가 질문해주길 기대하시는 눈치였어요. 전 오로지 오너를 기쁘게 해 드리려고 손을 번쩍 들고 만 거예요. 마이크를 잡고 부들부들 떨면서 안 되는 영어로 질문했는데, 연사가 알아듣지 못하더라구요. 직속 과장님께서 단번에 마이크를 잡고서 “닥터 최! 영어도 서툰 사람이 말이야. 질문하니까 당황 하시잖는가.”라고 망신을 주시는 겁니다. 쥐구멍에 숨고 싶더군요.”

▶자존심이 상하고 당혹스러웠겠습니다.
“(학회가 끝나고) 일주일 후에 병원 이사장님은 집무실로 나를 호출하셨어요. ‘배짱 좋더라. 앞으로 남부끄럽지 않게 영어 공부를 더 하라’시며 금일봉까지 주시는 겁니다. 거의 좌절모드였고, 자신감을 다 잃었는데, 순간 도전정신이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유학을 결심한 겁니다.”

▶영어공부를 하기 위해 외국 유학을 간 거라는 말씀이신지요.
“꼭 그런 건 아니고요. 이왕 불임의사가 되었으니 세계적인 트렌드를 알고 싶었어요. 또 해외 유명 병원의 의사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소통하고 싶었고요. ‘국제화 시대인데 한국에서 어느 대학 출신인 것이 뭐 그리 도움이 되겠는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학술지에 어떤 결과물을 제시했느냐가 더 중요할 거다’라는… 솔직히 의대 교수들도 외국 석학을 만나면 전공에 대해 한마디도 못하더군요. 그런 걸 보면서 ‘우리나라 의사는 한 단계 아래다. 여기 의사들과 경쟁을 안해야겠다.’라고 생각을 했어요.”

▶선배들 먼저, 그것도 지방대 출신 스탭에게 외국 연수기회가 주어지던가요.
“(병원 이사장님께서) 허락해 줬어요. 정말 그분은 저를 잘 봐 주신 것 같아요. 주위 의사들이 ‘들어온 지 1년 밖에 안 되었는데, 너가 가면 어떡하냐? 다른 사람 순번도 있는데…’ 난리가 났었어요. 제가 원로 선생님들을 다 모아놓고 통사정을 했었어요. ‘첫째,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제가 지방대 출신이다. 이 병원에서 진짜 오래 근무하고 싶은데, 환자들은 내가 지방대 출신이라는 걸 만족해하지 않았다. 내 스펙을 바꿔야되겠다.’라고… 제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짜 가는가 봐라. (외국 연수에) 가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라고 하더라구요.”

▶한숨이 나옵니다. 의사에게 출신 의대, 즉 학맥이 그토록 중요한가요?
“(의사들보다) 환자들이 더 심하더라구요. 외래에서 환자를 받으면 그 부모가 와서 ‘어느 대학 나오셨어요?’라고 물어요. 대답을 못하겠더라고… 내 환자가 ‘최 선생님은 S대 의대 나왔어.’라고 거짓말을 하는 거에요. 난 S대 안 나왔는데… 당시 제 나이가 서른넷이었는데… 우물쭈물 대답을 못하니까 ‘엄마 우리 선생님 K대 나왔나봐’라고 말하는 겁니다. 난 K대도 안 나왔는데… 결국 담당 의사를 바꿔 버리더라구요. 전 그때 ‘아! 이래가지고 안 되겠다. 유학이라도 갔다 올까’라며 좌절이 되기도 했었어요.”

▶첫 연수를 영국 캠브리지대 본홀클리닉에 가셨던데요,
“(첫 연수에서는) 미국 쪽으로 갈 자격이 안 주어져서 영국을 선택했어요. 본홀클리닉은 1978년도에 세계 최초로 시험관시술이 성공한 병원이고, 첫 체외수정 아기인 루이스 브라운양이 태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병원 앞에 작은 교회와 묘지가 있더군요. (묘지에는) 세계 최초로 시험관시술을 성공시킨 로버트 에드워드 박사님과 함께 연구를 진행했던 패트릭 스텝튜 박사 부부가 나란히 묻혀 있었어요.”

2010년 노벨생리학 수상자이기도 한 로버트 에드워드 박사는 1978년 영국 캠브리지대 본홀클리닉에서 세계 최초로 시험관아기 시술을 성공시킨 장본인이다. 요즘이야 체외에서 난자와 정자가 체외에서 수정되어서 자궁으로 이식되는 시험관아기 시술이 특별날 것이 없겠지만, 당시로서는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성공까지는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었다. 에드워드 박사가 시험관시술을 성공하기까지 약 20년이 걸렸으며, 그 기나긴 연구의 터널에서 스텝토 박사가 같이 했다.

스텝토 박사는 세계 최초로 복강경을 사용해 난자를 채취하는데 성공한 의사로, 에드워드 박사와 1968년 국제학회에서 만나서 공동연구를 시작했다고 한다. 300km나 떨어진 케임브리지와 올드햄 사이를 시도 때도 없이 왕복해야 하는 힘겨운 생활 10년만의 결과였던 거다.

▶로버트 에드워드 박사님을 직접 만나보셨나요?
“네… (그분이) 작년에 지병으로 타계하셨던데…”

그는 로버트 에드워드 박사를 만났을 때 일화를 털어놓았다.

“비참했어요. (그분과) 대화는커녕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거든요 영어는 말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듣는 게 더 중요하더라고요. 그냥 ‘헬로우’하고 악수하는 게 전부였어요. 그분을 만나고 나서 더더욱 ‘영어공부를 해야겠구나’라고 다짐을 했어요. 그래서 하버드 유학을 떠나게 된 겁니다. 불임의사랍시고 그 분야의 역사적인 석학과 한 자리에 앉았는데 단 한마디 말도 못했다는 것이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아쉽더라고요.”

▶영국 본홀클리닉과 미국 하버드 의대을 가 보셨는데, 집 형편이 괜찮았나 봅니다.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1994년 서울 구의동에서 전세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어요. 저희 집도 처가도 여유가 있는 게 아니었어요. 살고 있던 7000만원짜리 전세금을 빼서 유학을 가자고 하니 미쳤다고 하더군요. 50만원 월급에서 이제 겨우 몇백만원 받는 스텝이 되었는데 전세 빼서 유학을 가겠다니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겠습니까. 가족도 지인도 찬성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어요.”

▶영어도 안 되면서 미국 유학! 두렵지 않던가요.
“제가 영어가 안 되니까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전자상가에 가서 소형녹음기를 구입해서 귀에 꽂고 주머니에 넣고 다녔어요. 말은 밤새 시나리오를 작성해 외우면 되던데, 상대방 말을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겠더란 말입니다. 미국에 가서도 외국 교수가 무슨 말을 했는가, 영어 잘 알아듣는 동료들에게 물어보고. 비디오카메라로 실험하는 걸 찍어서 집에서 다시 캠코더 돌려가면서 보고… 미국 보스턴 사람들, 대부분 친절하긴 해도 말을 못 알아들으면 무시해버리더라고요. 말이 안 통해도 필링은 오잖아요. ‘아, 저 사람이 나를 무시하는 구나’ 느끼는 거죠.”

▶스트레스가 심했겠네요.
“말도 마세요. (스트레스 때문에) 체중이 빠지고 피부 발진까지 생겼어요. 피부발진이 6개월이상 계속되어서 에이즈 걸린 줄 알고 검사까지 해 봤어요. (웃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