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병원 면접장

“아버지는 뭘 하시나?” (면접관/의사)
“(아버지는) 바느질 하셨습니다.”
“써전(surgeon)이신가?” (면접관/의사)
“… …”
“어느 병원에서 계신가?” (면접관/의사)
“병원이 아니라 양복점 하셨습니다.”
“……” (면접관/의사)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평생 양복을 재단하시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단 한 번도 원망해 본 적이 없었던 청년의사의 얼굴에 노랗게 핏기가 사라져 버렸다. 아무리 서울 소재 유명 병원에 취직하는 게 꿈이라고 해도 아버지의 직업을 ‘써전(외과의사)’이라고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방대 의대 졸업장을 들고 상경해서 자존심이 상했던 차에, J병원 인턴 면접장에 막상 도착해 보니 유명 병원이라 그런지 취직 좀 해 보겠다고 모인 예비인턴들의 스펙은 촌놈 기죽이기 딱 좋았다. 서울에서 유명 의대를 졸업한 건 기본이었고, 온통 누구 집 아들 딸인 듯 했다.

그 틈새에서 용케도 청년의사는 선택이 되었다. 평생 옷을 재단하다가 고인이 되신 23년 갑자생 아버지의 7남매 중 막내아들이, 지방대 의대를 졸업했음에도 당당히 서울 사대문 안에 두 발을 비집고 들어서는데 성공한 가슴 떨리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모르긴 해도 청년의사는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그리운 아버지! 당신의 아들이 드디어 서울 OO병원에서 인턴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25년 후. 이 청년의사는 명의의 대열에 들어가도 손색이 없을 만큼 믿음직한 닥터가 되어 맹활약을 하고 있다.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시엘병원 최범채 원장이다. 불임시술 20년차에 접어든 베테랑 의사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탄탄한 실력을 자랑하고 있다. 이제 그는 전라남도 지역민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실력이 있는 의사이며, 최근에는 한국에서보다 중앙아시아, 특히 몽골에서 더 이름이 알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꽤 유명세를 알리고 있다.

기자는 지방대 의대를 나온 닥터 최.범.채.가 국내에서도 잘 나가는 불임의사로 인정받고 있고, 그것도 모자라서 자신의 위상을 외국 무대에서까지 떨치고 있는 그 비결이 궁금했다. 어쩌면 이것에 대한 호기심이 300km를 단걸음에 달려간 그 이유였는지 모른다.
 

5월 2일. 광주광역시 시엘병원.

아니나 다를까 최 원장의 걸음걸이는 자신감이 넘쳤다. 마치 해외 바이어를 만나서 담판을 지으며 판세를 끌고 가려는 듯 거침없는 말투와 제스처를 내보였다.

소위 ‘닥터’를 떠올리면 뇌리에 스치는 이미지, 다시 말해서 닥터 특유의 꼬장꼬장한 세심함과 거만함이 아니었다. 깐깐하기는커녕 서글서글한 웃음이 능청스럽기까지 했다. 뭐랄까. 천부적인 직관을 가진, 흔히 자수성가한 중년사내에게 느껴지는 특유의 뉘앙스가 있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사람의 심리를 모두 간파하고 있는 예리한 노장 같았다.

사람에 대한 첫 인상이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논리를 근거하지 않는다는 점을 모르는 게 아니지만, 그에게는 말과 글로 형언할 수 없는 묘한 기가 감돌고 있음이 느껴졌다. 의사 가운 너머의 다른 세계의 사람 같았다.

어쨌거나 최 원장은 닥터의 모습으로 기자와 장시간 대화를 했다. 의학적 소신을 설명할 때에는 영락없이 까다롭고 빈틈이 없어 뵈는 의사이긴 했다.

내과 의사에서 산부인과 의사로

▶불임 쪽 공부를 위해 외국에 유학까지 다녀오시고… 공부하는 의사 같습니다.
“세월이 지났으니 이제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전 산부인과 의사보다는 내과의사가 스타일에 맞습니다. 의과대학 신입생 때 아버님께서 간질환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때 저 또한 B형 간염 보균자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사실 그땐 내과 의사로 일하려면 간염 보균자일 경우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더 죽어라고 성실하게 일했던 것 같아요.”

▶간염보균자라서 J병원에서 내과 레지던트를 못하신 건가요? 산부인과 의사가 어떻게 되신 건지.
“(J병원에서) 내과 레지던트로 픽스턴(인턴 마지막 때에 전공의로 들어가는 과에 남으며 인턴을 마치는 것)이 된 상황이었는데, 밀려버린 거죠. 당시 소문이 돌았어요. 좋은 집안 자식들이 서울 시내 유명 의대 나와서 그 대학병원에 픽스턴이 안 되자, 손을 써서 J병원으로 몰려올 거라고. 난 배경도 없으니 큰일이었지요. 아니나 다를까 병원 측이 짜고 치는 고스톱을 하더라고요. 시험을 치는데 나에겐 35점 맞을 수밖에 없는 문제를 내고, 그 사람들은 95점 맞게 내면서 답을 가르쳐줘 버리고… 나랑 같이 내과에 픽스턴 했던 두 명 의사는 끝까지 부당하다며 병원에 남았지만, 전 깨끗하게 승복하고 나왔습니다. (J병원에서) 나와서 1년간 쉬고 있는데, 의협신문에 산부인과 의사를 추가로 구한다고 공고가 났어요.”

▶산부인과로 전공을 선택하고 J병원에 가서 스텝으로 일하게 된 계기라면요.
“노력을 인정받았던 것 같아요. (제가) 내과 레지던트로 픽스되었지만 그렇게 나가버리자 병원에서는 ‘최범채 선생 나간 건 부당하다’는 여론이 있었나 보더군요. 이건 제 자랑이 아니고요. J병원에 근무할 때 환자차트를 항상 정성껏 적었어요. 필체가 좋다보니 차트를 예쁘고 가지런하게 적기로 유명했었어요. 그리고 비록 인턴이었지만 환자가 사소한 불편을 호소하면 밤낮을 안 가리고 항상 직접 가서 환자상태를 보고 아스피린 하나라도 처방했었어요. 간혹 과장님 모시고 회진 돌 때 환자들이 나를 치프(레지던트 중에 가장 서열이 높은) 레지던트로 알고 있어서 곤란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답니다.”

▶그 비결이 뭡니까. 인턴이면서 레지던트 고참 의사로 보일 수 있는 비결이.
“(의사가 입는) 가운이 꼬질꼬질한 게 싫어서, 가운을 네 벌이나 마련했었어요. (네 벌의 가운으로) 청결하게 입고 다녔고 각까지 세워 폼을 냈어요. (웃음) 또 간호사들 사이에서는 이런 얘기가 돌았다고 합니다. ‘최범채 선생은 새벽에 전화하면 항상 깨어 있는 목소리로 받더라’고. 제가 인턴으로 근무할 당시 J병원 이사장님이 이건희 회장 사촌형님이셨어요. 그분이 저에 대한 소문을 듣고 눈여겨보고 계셨다고 하더군요. 제가 내과 레지던트로 남지 못하고 나가 버려서 안타까우셨나 보더군요.”

▶아무리 안타깝다고 해도 다시 부르다니 대단히 신뢰했나 봅니다.
“그때 마침 J병원 불임분과가 시끄러웠어요. 노성일(現 미즈메디 원장), 이승재(現 미래와희망 원장) 선생님 등 기라성 같은 불임의사들이 개원하기 위해 우르르 퇴직해 버렸거든요. 풍전등화, 사상누각의 위기상황이었다고 할까요. 제가 다른 병원에서 레지던트 4년차를 하고 있는데, 그분이(이사장님이) 병원 비서실을 통해 산부인과 펠로우 제안을 하신 겁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