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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험관아기 임신 성공, 그 보다 더 큰 기쁨은 없었다

[파워인터뷰] 장윤석 전 서울대병원 산부인과 교수가 털어놓은 국내 최초 시험관아기 시술 성공비화

글  이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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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승주
사진 : 장은주 기자

장윤석
●본관 인동. 1931년 강원도 출생. 춘천고 서울대 의대 졸업.
●前 대학불임학회 회장, 前대한산부인관시경학회 회장
●前 아시아 오세아니아 산부인과 연명(AOFOG) 회장, 국민훈장 목요장(1985)
●2011년 아시아 오세아니아 산부인과 연명(AOFOG) 장윤석상(Y.S.CHANG AWARD) 제정
●現 마리아의료재단 명예원장.

 

   
 

 

 


1985년 10월 12일 5시 10분. 서울대병원 분만실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한국 최초의 시험관 아기가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국내 언론은 주목했다. 1978년 7월 세계 최초로 영국에서 시험관시술로 아기가 태어난 이후 호주, 미국, 독일, 프랑스, 체코, 핀란드와 싱가포르, 일본, 대만에서 성공한 시험관아기 시술이 국내 의료진에 의해 전 세계 열 번째로 성공한(출산까지) 역사적 날이기 때문이었다.

 


그 성공 신화를 이끈 주인공은 당시 서울대병원 산부인과 과장 장윤석(83, 현 마리아의료재단 명예원장) 교수였다. 당시 장윤석 박사는 30명의 불임부부를 대상으로 체외수정술을 시도했고, 그 중 한 부부에게 임신은 물론 출산의 기쁨까지 안겨주었다.


시험관시술이 이 땅에서 행해진지 어언 30년. 이제는 국내에서 난임으로 인해 인공수정과 시험관시술을 시도하려고 불임병원을 방문하는 숫자가 연간 19만여 명에 이르고 있다.


기자는 국내 최초로 시험관 시술과 출산을 성공시킨 주인공 장윤석 박사를 만나 그때 그 시절의 얘기를 들어봤다. 장윤석 박사는 여든이 넘은 나이임에도 정갈하고 꼿꼿한 모습으로 기자를 맞아줬다.

 


중학생 때 서북청년회 활동


▶ 건강해보입니다. 특별히 건강관리 비법이 있습니까?

“그래도 나이 값을 다 하고 삽니다. 이 나이가 되면 먹는 약이라든가, 남이 하는 것만큼 다 먹고 하고 살아요. (서울대병원을) 정년퇴임한지 18년째인 걸요.”


▶남 하는 것만큼 다 하셔도 술은 자제하시겠지요?

“그럼요. 그전에는 말도 못했어요. 술은 옛날에 보통 사람 평생 먹을 술의 몇 배를 다 먹었어요. 그땐 양주 큰 병 한 병을 혼자 다 마셔야 2차를 갔어요. 요즘은 맥주 조금 인사로만 마시죠. 신장염을 앓고부터 조심하며 살았어요. 2년 정도 고생했으나 주치의가 움직여도 된다고 해서 낚시를 했어요.”


▶ 낚싯대를 던져 놓고 있으면 지나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갈 것 같습니다. 박사님은 그야말로 대한민국 격동의 역사를 다 겪으셨지요? 6.25전쟁 때 서울대에 입학하신 건가요.

“내 고향이 강원도 양구입니다. 6.25사변 전에는 이북 땅이어서, 2년간 김일성 치하에서 살았어요. 전쟁 터지기 2년 전에 월남을 했으니 저도 ‘삼팔따라지’인 거죠. 김일성 치하에서 공부는 무슨 공부! 순전히 사상교육만 받았죠. 김일성 때문에 밤낮 불려나가서 독서회하고 세뇌교육 받다가 월남했어요. 제가 이북서 서북청년회 회원이었어요. 무서운 극우단체였는데, 전 학생연맹 가입할 나이였는데, 백으로 서북청년회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이북서 ‘김일성 죽여라’는 삐라 붙였어요.(웃음)”


▶해방되고 6.25전쟁까지 제대로 중등교육을 받을 수 없었을 텐데요,

“기자양반, 제가 질문 좀 할게요. 8.15해방 때 강원도 전체에 중학교가 몇 개 있었는지 아세요? 딱 두 개 있었어요. 춘천에 하나, 철원에 하나, 제가 중3 때 해방이 되었어요. 그땐 말이 학생 신분이지 허구헛날 동원이 되어서 봉사하러 다녔어요. 송탄유라고 들어보신 적 있어요? 군함을 움직이는데 일본놈들이 기름이 없잖아요. 소나무에서 기름을 짜서 군함을 움직이려고 했어요. 그 소나무 캐러 동원이 되었어요.”


▶그런 환경에서 어떻게 서울대 의대에 입학할 생각을 하셨어요?

“아버지가 산부인과 의사였어요. 할아버지는 한의사셨구요. 집안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이 있으니까 ‘(나도) 의사 해야겠다’ 생각했어요. 춘천중학교에서 6학년 졸업장 받고 서울로 올라온 겁니다. 서울대 의대에 1949년도에 입학했어요. 그때도 서울대 의대 입학자가 총 120명이었어요.”


▶서울대 의대 입학하자 전쟁이 났네요.

“그렇죠. 전쟁 터져서 부산에 피난 가서 (서울대 의대생이) 다 모이니까 겨우 16명이었어요. 난리통에 대학 측이 고민 끝에 편입을 받아줬어요. 1.4후퇴 때 김일성대학 의학부생, 함흥의대생 다 받아준 거죠. 97명 졸업생 중 16명만 처음에 같이 입학한 사람들이고, 다 편입생이었어요. 제 의사 면허번호가 4024번, 전문의 번호는 173번일 겁니다.”

 

서울대병원장이 8만 불 내 놓아

▶대체적으로 이북 분들이 기술 쪽에 조예가 싶고, 이재에도 밝던데, 그 시절에 서울대 의대 졸업하신 산부인과 의사로 개원을 하시지, 왜 서울대학교 교수의 길을 선택했나요. (개원하셨더라면) 돈 많이 벌었을 터인데.

“그게 우리 마누라가 맨날 하는 소리입니다. 지금이야 개원하는 의사들이 재미 별로 못 보지만, 그때는 간판만 붙이면 돈이 그냥 막 들어왔던 시대였잖아요. 그냥 가마니에 쓸어 담았다고 하더군요. (개원의들이) 몇 년 지나면 집사고, 몇 년 지나면 땅 사고… 마누라가 이게 뭐냐고 속상해 하더라구요.”


▶돈보다 명예가 좋으셨나 봅니다.

“무슨 뜻이 있었다기 보다, 교수하는 게 더 좋았어요. 그 돈 몇 푼 더 받으면 뭐해요. 정년퇴임 하고도 여기저기서(사립대학) 와서 원장하고 하는 데가 많았는데, 사립대학 병원에 가 봤댔자 좋은 일은 이사장이 다 해먹고 귀찮고 골치 아픈 건 내가 다 해야 하잖아요. 또 (병원을) 내가 차리면 내가 다 경영해야 하는데, 싫었어요.”


▶1980년에 50대 의사셨는데, 그땐 대학병원에서 분만이나 수술로 바쁘셨을 텐데 (장 박사님께서는) 개혁가 스타일 의사였다고 하더군요.

“산부인과 과장이 아니었더라면 시도할 생각조차 못한 걸 했어요. 산부인과 교수로 이런 저런 꿈이 많았는데 1982년에 과장이 딱 되는 거라. 그래서 제일 처음 제가 한 일이 뭔지 아세요? 산부인과 과를 나누는 거였어요. 산부인과에서 세부전공이 안 나눠져 있었을 때였거든요. (과장이 되자마자) 암, 애기 받는 쪽, 불임 쪽으로 딱 나누니 교수들의 반대가 말도 못했어요. (자신의) 환자가 줄까봐서. (몇 달 지나면서) 내가 한 그 일이 옳았다 소문이 돌기 시작하더라구요.”


▶산부인과 세부전공에서 불임 쪽 파트를 신설하신 걸 보면 불임시술에 관심이 많으셨나 봅니다.

“제가 해외 학회에 많이 나갔어요. 또 78년도에 영국의 에드워드 박사가 시험관시술 성공했잖아요. 여기저기에서 시험관시술이 성공하는 걸 보면서 ‘우리도 빨리 해야 할 텐데’ 싶었어요. 그러던 차에 산부인과 과장이 되자 바로 영국에 단기연수를 갔어요. 세계 최초로 시험관시술 성공한 병원인 올드햄은 종합병원이었는데, 저는 영국에 런던에 있는 햄머스미스 병원으로 갔어요. 거기에 윈스턴이라는 박사가 있었는데 정자 난자 미세수정 시키고 현미경 수술을 참 잘하는 사람이었어요. 그 밑에 가서 우선 이것저것 배웠죠.”


▶시험관아기 시술이라는 것이 단순히 기술을 배운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건 아니었을 텐데. 그 전부터 체외수정술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셨던가 봅니다.

“미국에서 시험관시술 최초로 한 곳이 버지니아주 노폭시에 있는 동버지니아대학 안에 노폭센터잖아요. 노폭센터의 하워드 존스박사가 지금 103세에요. 지금도 출퇴근한다고 들었어요. (그분은) 아직도 크리스마스 카드를 저에게 보내주십니다.

사실 제가 그분과 인연이 깊어요. 1970년대였어요. 그 양반이 존스홉킨스 의대병원에 계실 때 제가 그곳에서 만난 적이 있었어요. 그분이 존스홉킨스 의대를 관두고 노폭 시험관센터로 가신 거예요. 제가 산부인과 쪽 학회장을 할 때 그분을 네 번 서울로 초청했었죠. 그 인연으로 우리 쪽에서 기술 배우러 노폭센터로 보낼 수 있었어요.”


▶시험관시술이라는 것이 산부인과 교수 혼자 배운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정자 난자 수정시키는 등의 배양기술도 배워야 했을 것이고, 다양한 장비도 필요했을 텐데 어떻게 마련하셨나요.

“기자양반, 그 질문 참 잘하셨소. (하소연하듯) 그 시절에 국립대학교에서 기구 하나 마련하려면요, 조달청을 통해서 입찰하고 뭐하고… 빨라야 6개월 걸렸어요. 그 짓 하고(6개월 기다리고) 있다가는 (시험관시술 해보는 도전을) 남한테 뺏길 게 뻔했어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춘천고등학교 선배한테 가서 설명을 했죠. 그 분이 흉부외과 의사로 당시 서울대병원장이셨어요. (그분에게) 하소연을 했더니, 그 분이 ‘(내가) 영수증 없이 쓸 수 있는 돈이 8만불 있다. 이걸로 해봐라’고 하대요. 그때 8만 불이면 어마어마한 돈인데, 배양 인큐베이터랑 현미경 같은 걸 싹 마련할 수 있었어요. 기구가 비싸더라구요. 예를 들어서 배아 이식용 카데타만 해도 소모품인데, 그걸 구입하는 데에만 4천만원 들어가더라구요.”

 

봐줄 땐 홀랑 벗고 봐주는 양반

▶돈도 마련되었겠다. 이제는 교수님 손과 발이 필요했겠네요.

“(불임시술 도전이) 돈 있다고 되는 게 아니었어요. 기술을 배워야 하잖아요. 돈 있고 열정이 있다고 해서 기술 없으면 안 되는 거니까. (체외수정술을) 해보려는데 팔다리 노릇 할 사람이 있어야 하고, 기술도 있어야 했어요. 작년에 서울대 의대 정년퇴임한 문신용 교수가 그때 나를 도왔어요. 1980년대 초반에만 해도 문 교수가 레지던트 끝내고 군대 갔다 와서 서울대 교수 좀 해 보려고 기웃거릴 적이었어요. ‘옳거니 문신용을 전임강사로 만들어서 외국에 기술 배우러 보내야겠다’ 생각했죠.”


▶그때 그 시절에 서울대교수가 되면 해외여행 몇 년간 못가지 않았나요? 5공화국 시절에 그랬던 걸로 알고 있어요. 문 교수님이 전임강사가 된다면 해외여행 금지 때문에 미국에 연수를 갈 수 없었을 텐데.

“맞아요. 후보자가 되어도 (서울대 교수채용) 인사위원회에서 통과하면 6개월 즈음 지나야 정식 발령이 나고, (발령이 나면) 2년간 해외여행을 못 나갔어요. (서울대 교수로) 발령 나기 전에 보내서 6개월 안에 기술을 배우고 올 수 있으면 되겠다 싶었죠. 미국 노폭센터 하워드 존스에게 전화를 해서 ‘(시험관 기술 배우러) 교수 한 명을 연수를 보내겠다’고 하니 (연수 대기자가) 2년간 꽉 차 있다며 안 된다고 하는 거예요. 못 하는 영어로 사정사정을 해도 6개월 기다리라는 겁니다. 하워드 존스박사에게 세 번을 더 전화해서 겨우 6개월 전에 보낼 수 있었어요. 그런데 문제가 터졌어요.”


▶어떤 문제였나요?

“일이 안 되려니까 서울대 교수 발령까지 6개월이 뭡니까. 바로 나 버린 거예요. (문 교수가) 외국에 가자마자 입국해야 했어요. 문신용 교수 입장에서는 서울대 교수로 발령이 났으니 최고로 기쁜 일이겠지만 저로서는 난감했어요.”


▶그런 문제라면 대학 측에서 봐주고 미뤄주고 하지 않나요. 그때 그 시절에.

“당시 의대 학장이요, 털 뽑아서 그 구녕에 넣지, 옆 구녕에 안 넣는 곧이곧대로인 원칙주의였어요. 학장이 나에게 전임강사 추천을 취소하던지, 외국에서 한국으로 소환을 하던지 하라며 안 봐주는 겁니다. 서울대 의대 전임강사 되는 게 하늘의 별따기인데, 남의 앞날을 막아도 분수가 있지, 그건 못하겠더라구요. 아휴. 어렵게 어렵게 못하는 영어까지 해서 연수기회를 따낸 건데, 보낸지 한 달도 안 된 연구원을 돌려보내달라고 하면, 그 양반(하워드존스)이 나에게 ‘정신병자 아니야’라고 할 거 아닙니까. (한숨)”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던데, 구멍이 있었나요.

“그때 권이혁 교수가 서울대 총장(15대)이었어요. 권 총장과는 개인적으로 잘 알거든요. 의사로 총장이 되신 분인데, 권 총장은 후배나 부하를 봐줄 적에는 아주 홀랑 벗고 봐주는 분입니다. 제가 권 총장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말하니 교무처장을 불러서는… 이 양반이 있지도 않은 거짓말을 하더라고. (권총장이 교무처장에게) ‘장 교수와 내가 의논해서 사람 하나 미국에 보냈는데, 전임강사 발령이 나 버렸네. 이거 어떡하냐’라고.

교무처장이 웃으면서 ‘총장님 별걸 걱정하십니다. 전임강사는 총장 발령인데, 취소했다가 문 교수가 김포공항에 도착하는 날 재발령을 내시면 되지 뭐 걱정을 하십니까.’라며 한마디로 해결 해버리는 거라. 그때 제가 총장님과 교무처장에게 절을 열 번은 더 했을 거예요. 권 총장의 판단에 저는 너무 놀라웠어요. 후배를 봐 주기 위해서 고급 거짓말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이.”


▶문 교수가 연수를 마치고 돌아오자 바로 시험관시술을 시도했나요?

“1983년에 셋업을 했어요. 처음에는 쥐로 동물 실험으로 했어요. 쥐의 난자로 배양하고 체외수정하고 쥐 자궁에 수정란 넣고 했어요. 84년부터 사람을(부부를) 상대로 했습니다. 제대로 잘 할지 모르니까 어느 부부가 응하려 했을까 싶지요. 아니었어요. 그냥 원가로 해준다고 하니 죽고 살고 문제가 아니라 잘 되면 자식 낳을 수 있는 일이니까 너도 나도 해보겠다더라구요. (시험관아기 시술) 첫 번째 성공 때까지 서른 번은 했어요.”


▶첫 성공 때 기분이 어떠셨어요?

“(솔직히) 아이가 태어났을 때 보다 임신에 성공했을 때 더 기뻤어요. (그 기쁨을) 말로 표현할 수 없죠. 가슴이 두근두근 떨리더라구요.”

 

 

 

 

 

   
▲ 국내 최초 시험관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 1985년의 일이다.

 

 

 

 

 

▶첫 시험관시술로 태어난 남녀쌍둥이는 건강하게 잘 자랐나요.

“그럼요. 누이와 남동생으로 쌍둥이였어요. 3년 전까지 연락이 되었어요. 서울대 산부인과에서 백일잔치 돌잔치 다 해줬어요. 초등학교 입학한다고 파티해주고, 중학교 고등학교 들어갈 때마다 연락을 해서 축하해줬어요. 스무 살 파티 때에는 연락하니까 남자아이가 군에 입대를 했더라구요. (제가) 부대장에게 편지를 썼어요. 일주일 휴가 좀 내달라고. 자초지종 다 써서 보냈더니 오케이 받았어요. 제가 알기로는 누이는 교사일 거고, 남동생은 삼성계열 어느 회사에 근무할 겁니다.”

 

 

   
▲ 국내 최초 시험관 아기로 태어난 쌍둥이 남매. 장성하여 현재 회사원, 교사로 일하고 있다.

 

 


 

 

▶시험관시술 성공으로 전국의 불임부부들이 벌떼처럼 몰렸겠어요.

“일 년에 천 명 정도 왔어요. 서울대학교에서 성공했다고 난리치니까, (시험관아기 시술을) 차병원에서도 성공하고, 고려대학도 하고, 경희대학도 하고 막 하는 거예요. 그런데 다른 대학병원들은 몇 군데 제외하고 연속적으로 체외수정술 도전을 하진 않더라구요. (시험관아기 시술이라는 것이) 돈도 있어야 하지만 기술을 배워야 하니까 돈 많은 개인병원이 더 환경이 좋았어요. 차병원, 마리아병원, 제일병원이 다 그래서 시험관시술을 하게 된 겁니다. (불임 시술 실력은) 전문병원이 더 잘해요. (시술을) 자꾸 해보니까 배양기술도 노하우가 쌓였고요. 성공률이 높죠.”


▶시험관시술 30년째인데 한국의 불임시술 수준이 어느 정도라도 생각합니까.

“최고입니다. 세계적으로 손꼽는 나라 중 하나가 되었어요. 미국도 한 해 몇만 명 시술하지 않을 겁니다. 또 한국의 불임병원들은 최근 10년간 아주 많이 해 봤어요. (선진국에 비해) 병원비까 싸니까 너도 나도 시술 받았잖아요. 의사 입장에서는 임상경험 많이 해 본 겁니다. (우리나라는) 의료수가가 낮아서 병원 문턱이 낮잖아요. 산부인과뿐만 아니라 다른 과도 경험이 많아질 수밖에 없어서 의료수준이 이처럼 높아진 거랍니다.”


▶한국 의사들이 손기술이 좋다면서요.

“그럼요. 손끝 테크닉이 한국 사람이 최고에요. (제가) 70년대에 존스홉킨스 의대에 연수를 갔을 때 보니까 산부인과 의사들이 루프(피임기구) 넣는데 5분, 10분이나 걸리더라구요. 우리나라 산부인과 의사들은 30초면 넣어버리거든요. (한국에서는) 산아제한 때문에 전국 각지에 산부인과 의사들이 많이 넣어봤고 저도 수백 개 이상 넣어봤기 때문에 능숙하게 할 수가 있는 거죠. 그때 우리 쪽에서 간 산부인과 의사들이 미국 산부인과 의사들을 가르쳐야 했다니까요. 선생과 제자가 뒤바뀌는 거지. 정말이지 손재주는 우리나라 못 따라와요.

기능 올림픽에서 한국 출전자들 성적 대단하잖아요. 왜 그런지 아세요? (한국인들은) 젓가락질을 해서 그렇다 농담하는데… 일리가 있어요. 그럼 젓가락질은 한국 사람만 하느냐? 일본 사람도 하고 중국 사람도 한다지만, (그 젓가락질이) 달라요. 일본도 젓가락 쓰잖아요. 그건 쉬워요. 중국 젓가락도 비교적 쓰기가 쉽고, 제일 어려운 게 놋젓가락 쓰는 건데, 한국 사람들은 세 살부터 쓰니… 손재주가 보통이 아니에요.”

2011년. 아시아오세아니아산부인과연맹(AOFOG)은 전 회장인 장윤석 전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의 이름을 딴 상을 제정했다. ‘YS Chang Award(장윤석상)’이 바로 그것. AOFOG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개인의 이름을 부여한 상을 만든 거였다.

장 박사는 “(장윤석상은) 2년에 한번 우수한 업적을 남긴 의사 단 한 명에게 준다”면서 “상금(미화 3000달러)과 은메달을 수여하는데 벌써 두 번째 수상자가 나올 때가 되었다”라고 했다. 장윤석상의 재원은 대한산부인과학회에 설립된 ‘YS Chang Foundation(장윤석 장학기금)’에서 조달하고 있으며, 임진호 마리아병원장 등 국내 산부인과 의사 중 수십여명이 장학금 후원을 했다고 한다.

장 박사는 “(아직도) 일 년에 해외를 네다섯 번 나간다”면서 “(세계적인) 학회에 가서 좌장도 해 주고, 덕분에 여행도 한다. 미수(米壽)가 되어 가는데도 불러주는 곳이 있는 걸 보면, 지난 세월 내가 고집 세워서 한 일들, 열심히 산 것에는 후회가 없다.”고 했다.

장윤석 박사가 지금까지 쓴 논문은 무려 570여 편에 이른다. 서울대 의대 교수를 퇴직하고도 100편은 더 썼다고 한다. 그는 “(논문 많이 썼지만) 그 흔한 수필집 하나 쓰지 못했다”며 “(내가) 미수까지는 살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던졌다.

“기자양반, 죽은 다음에 자식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뭔지 아세요?”

“……”

장박사의 말이 이어졌다.

“앨범이랍니다. (유산으로) 남길 바에야 비싼 골프장 회원권이나 돈을 남겨야지, 앨범을 남기면 처치가 어렵지 않을까요. 다 태워버릴 수도 없고. (나는) 논문, 책, 앨범… 자식들이 싫어하는 것만 남기고 가게 생겼어요.”

“… … ”
 

[입력 : 2017-01-23]   이은영 기자 more 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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