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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슈

위대한 세대의 '1등 철학'

“미래는 도전하는 사람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최종현 SK 선대회장 타계 20주년...SK그룹 추모 행사 열어

글  백두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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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을 내다본 혜안으로 무자원 산유국, ICT·반도체 강국 등 미래비전 실현
◎“인재 없으면 미래도 없다”...한국고등교육재단, 인재의 숲 등 장학사업
◎폐암으로 69세 짧은 생애 마치면서 火葬 유언...장례문화 개선 전기 마련
◎21세기 일등국가 꿈꾸며 대한민국의 핵심산업 일으킨 한국경제의 선각자
대한민국 경제를 일군 또 한 명의 ‘영웅’ 이야기다. 주인공은 최종현(崔鍾賢) SK그룹 선대회장. 생전 ‘늘 10년을 내다본 기업인’으로 평가받았던 그였다. 오는 26일은 고인(故人) 20주기 기일(忌日)이다.
 
SK는 24일 서울 광진구 워커힐호텔에서 그룹 차원의 20주기 추모제를 열기로 했다. 14일부터는 SK그룹 계열사 사업장에 최 회장의 생전 활동을 담은 사진전을 선보인다.
  
독자 기술개발 강조한 ICT 선구자
   
최종현 회장은 1973년 SK그룹의 창업주이자 친형인 최종건 회장이 세상을 떠나면서 그룹 회장직에 올랐다. 이후 98년 타계하기까지 25년간 그룹을 발전시켰다. 그는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대한민국을 ‘무자원 산유국’으로 만들었고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 또 세계 최초 CDMA 상용화로 ICT 강국의 기반을 닦았다.
 
생전 최 회장은 독자적 기술개발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했다.
     
“생산비를 줄이려면 기술개발보다 로열티를 주고 외국으로부터 사오는 편이 안전하고 유리하다. 그러나 이윤을 많이 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자체적인 기술개발이다. 부존(賦存)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는 기술 개발을 통해 치열한 국제경쟁에서 이기고 계속 수출을 확대시켜야 발전할 수 있으며 이것이 한국 기업가의 사명이다.
 
1980년대 말 당시 선경화학이 세계에서 네 번째로 비디오테이프를 개발했는데 이는 최 회장의 ‘독자기술 경영철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최 회장이 평소 자랑하고 있던 몇 가지 사례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 폴리에스테르 생산과 비디오테이프의 독자적인 기술 개발이다.
 
최종현 회장은 “미래는 도전하는 사람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는 신념을 가진 기업이었다. 최 회장은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한 원대한 꿈을 치밀한 준비(지성)와 실행력(패기)으로 현실로 만들었다. 그에게 ‘불가능’은 미래를 내다보고 치열하게 준비하지 않은 사람의 핑계에 불과했다.
    
대한민국을 이끌 인재를 키우겠다는 일념으로 사재(私財)를 들여 한국고등교육재단을 설립, 가난한 대한민국 청년들을 조건 없이 유학을 보내는 등 평생을 인재양성에 힘썼다. 전경련 회장 시절인 1997년 폐암 말기 진단을 받고 병마와 싸울 때도 산소호흡기를 꽂은 채 경제 살리기를 호소했던 최종현 회장은 1998년 8월 26일 69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다. 최종현 회장은 화장(火葬)이 드물었던 시절 화장 유언을 남겼고, 가족들이 이를 실천해 사후에도 큰 울림을 남겼다.
 
그는 생전 지인(知人)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사업을 하는 사람은 장사꾼이고 돈만을 벌겠다면 그건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다. 돈 이외의 목적으로 사업을 하는 사람이 진짜 기업가다. 나는 돈만을 탐내는 장사꾼이 되고 싶지는 않다. 장사꾼과 기업가의 차이는 돈을 어떻게 모으느냐는 데도 있지만 돈을 어떻게 쓰느냐에 있다. 개인적인 이해보다 국가 경제에 대한 공헌을 우선시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기업가 정신이라 할 것이다.
 
“운(運)만으로 큰 사업을 할 수 없다
   
최종현 회장은 자본, 기술, 인재가 없었던 1973년 당시 선경(현 SK)을 세계 일류 에너지·화학 회사로 키우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천명했다. 섬유회사에 불과한 SK가 원유정제는 물론 석유화학, 필름, 원사, 섬유 등에 이르는 수직계열화를 선언한 것인데, 많은 이들이 ‘불가능한 꿈’으로 치부했다. 그러나 최종현 회장은 장기적 안목과 중동지역 왕실과의 석유 네트워크 구축 등 치밀한 준비 끝에 1980년 대한석유공사(유공)를 인수했다.
 
최 회장은 1983년부터 해외유전 개발에 나섰다. 성공확률이 5%에 불과해 주변에서 만류했지만 뚝심 있게 사업을 추진, 이듬해인 1984년 북예멘 유전개발에 성공했다. 대한민국이 무자원 산유국 대열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이후 1991년 울산에 합성섬유 원료인 파라자일렌(PX) 제조시설을 준공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
  
최종현 회장은 전경련 회장을 맡으면서 정부를 향해 ‘할 말’은 했다. 1995년 11월 3일 열린 긴급 재계중진회의에서 인사말을 하는 최종현 회장.

최종현 회장은 미래설계가 그룹 총수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산업동향 분석을 위해 1984년 미국에 미주경영실을 세웠다. 이후 정보통신 분야를 미래 성장동력으로 삼은 최 회장은 미국 ICT 기업들에 투자하고 현지법인을 설립해 이동통신사업을 준비했다.
    
앞선 준비 끝에 1992년 압도적 격차로 제2이동통신사업자에 선정됐다. 그러나 특혜시비가 일자 사업권을 자진 반납했다. “준비한 기업에는 언제든 기회가 온다고 내부를 설득한 최종현 회장은 실제로 2년 뒤 문민정부 시절인 1994년 한국이동통신 민영화에 참여, 이동통신사업에 진출했다.
 
당시 주당 8만 원대이던 주식을 주당 33만5000원에 인수하기로 하자 주변에서 재고(再考)를 건의했다. 하지만 최 회장은 “이렇게 해야 나중에 특혜시비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다면서 “앞으로 회사 가치를 더 키워 가면 된다고 했다.
 
“인재를 키워야 경제대국으로
  
최종현 회장은 SK의 성장조차 불투명했던 1970년대부터 인재양성에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비록 대한민국이 아직은 개발도상국이자 자원빈국 처지이지만 인재를 키우면 얼마든지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확신에서다.
    
최종현 회장은 1972년에 조림사업으로 장학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서해개발(現 SK임업)을 설립했다. 1974년에는 사재를 털어 한국고등교육재단을 설립했다.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500달러도 안되던 시절 “일등국가가 되기 위해선 세계적 수준의 학자들을 많이 배출해야 한다는 최종현 회장의 의지가 반영된 재단이다. 재단은 당시 서울 집 한 채 값보다 비싼 해외 유학비용은 물론 생활비까지 파격적인 지원을 했다.
 
재단이 44년간 양성한 인재는 국내외 곳곳에서 거목으로 자랐다. 약 3700명의 장학생을 지원했고 740명에 달하는 해외 명문대 박사를 배출했다. 이들 중 80% 이상이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동양계 최초 예일대 학장인 천명우(심리학과), 한국인 최초 하버드대 종신교수 박홍근(화학과) 등 세계적 석학이 된 이들은 학술교류와 민간외교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최종현 회장(왼쪽)이 1986년 해외 유학을 앞둔 한국고등교육재단 장학생들에게 장학증서를 전달하고 있다. 사진=SK
 
SK 경영 3대 원칙 중 하나 
 
SK에는 경영의 3대 원칙이라는 것이 있다. 그중의 하나가 인간 위주의 경영이다. 그 안에는 기업을 움직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인 만큼 인간을 존중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최종현 회장이 1980년 7월 전국경제인연합회에서 강연할 때 이렇게 말했다. 
      
“기업은 사람이다. 기업은 문자 그대로 사람이 업(業)을 기획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많은 사람은 사람이 기업을 경영한다는 이 소박한 원리를 잊고 있는 것 같다. 세상에는 돈이 돈을 번다는 말이 유포되고 있지만 돈을 버는 것은 돈이나 권력이 아니라 사람인 것이다. 나는 내 일생을 통해서 한 80%는 인재를 모으고, 기르고, 육성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기업경영에서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첫째도 인간, 둘째도 인간, 셋째도 인간이다.
   
시대를 앞선 유언으로 火葬과 통 큰 기부문화 이끌어
    
최종현 회장은 폐암으로 갑작스레 타계하기 직전 “내가 죽으면 반드시 화장(火葬)하고 훌륭한 화장시설을 지어 사회에 기부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묘지 난립으로 좁은 국토를 효율적으로 활용 못하는 것을 평소 안타까워했던 최종현 회장은 사회지도층 인사 중 처음으로 화장을 택하면서 장례문화를 선도한 것이다.
  
최종현 회장의 시대를 앞선 유언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최종현 회장 사후 한 달 만에 ‘한국 장묘문화개혁 범국민협의회’가 결성돼 ‘화장 유언 남기기 운동’이 전개됐다. 최 회장 장례가 유언대로 화장으로 치러지자 1998년 20%에 불과했던 화장률은 이듬해 30%를 넘는 등 매년 급증했다. 현재는 82%에 달할 만큼 대중화됐다. SK그룹은 고인의 유언에 따라 2010년 1월 500억 원을 들여 충남 연기군 세종시 은하수공원에 장례시설을 준공해 세종시에 기부했다.
  
최태원 현 회장에게 이어진 ‘최종현  경영철학’
   
최종현 회장이 남긴 경영 DNA는 장남 최태원 회장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최종현 회장이 항상 10년을 내다보고 준비한 끝에 SK를 직물회사에서 석유화학과 정보통신을 아우르는 그룹으로 성장시켰다면, 최태원 회장은 2011년 하이닉스 인수 등을 통해 반도체와 바이오 등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했다.
  
최태원 회장은 하이닉스 인수 직후 “하이닉스가 SK 식구가 된 것은 SK의 반도체 사업에 대한 오랜 꿈을 실현하는 의미가 있다면서 30년 전 최종현 회장의 못다 이룬 꿈을 언급했다. 최종현 회장이 1978년 미래 산업의 중심이 반도체가 될 것임을 예견하고 선경반도체를 설립했으나 전 세계를 강타한 2차 오일쇼크로 꿈을 접어야 했던 과거를 회상한 것이다.
   
최태원 회장이 1998년 취임할 당시 SK그룹은 매출 37조4000억원, 순이익 1000억원, 재계 순위 5위였으나 현재는 매출 158조원, 순이익 17조3500억원, 재계 순위 3위로 성장했다. 또한 최종현 회장의 사업보국과 사회공헌 경영철학은 최태원 회장의 사회적 가치와 공유인프라 전략 등으로 진화 발전해 여러 이해관계자의 더 큰 행복을 키워나가고 있다.
     
이항수 SK그룹 홍보팀장(전무)은 “최종현 회장의 혜안과 통찰 그리고 실천력은 후대 기업인이 본받아야 할 가치로 인정받고 있다며 “SK그룹은 앞으로도 최종현 회장의 경영철학을 올곧게 추구해 사회와 행복을 나누는, 존경받는 일등기업으로 지속 성장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입력 : 2018-08-13]   백두원 기자 more 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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