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에서 영감을 얻고, 또 생물을 본뜨는 연구야말로 모든 지식을 융합하는 분야임에 틀림없다. 2008년 10월 《지식의 대융합》을 펴낸 이후 강연과 저술을 통해 지식융합, 기술융합, 산업융합의 대중적 확산에 전념해 온 필자로서는 이 신생 분야를 국내 독자에게 서둘러 소개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2012년 5월 《자연은 위대한 스승이다》를 펴낸 것도 그 때문이다. 필자는 생물영감과 생물모방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자연중심 기술’이라는 말을 만들어 이 책에서 처음 사용했다. ▲자연을 본떠 만든 물질 ▲생물을 모방하는 로봇 ▲인체 부품을 보완하는 신경보철과 인공장기 ▲집단 지능 ▲에너지 ▲자연에서 배우는 건축 등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배울 것이 너무 많다.
생물영감과 생물모방
자연중심 기술(청색기술) 개념도. |
《생물모방(Biomimicry)》을 쓴 미국의 생물학 저술가 재닌 베니어스는 생물모방을 ‘자연에서 영감을 얻는 혁신(innovation inspired by nature)’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박테리아가 지구상에 처음 나타난 이후 38억 년에 걸친 연구와 개발의 결과, 생물 중에서 실패작들은 화석이 됐다. 지금 우리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생존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세계가 자연세계를 더 닮고 자연세계처럼 기능을 발휘하면 할수록 이 행성은 우리를 더 잘 받아들일 것이다"고 했다.
그렇다면 자연에서 영감을 얻어 개발한 과학기술의 사례로 어떤 것들이 있을까.
1998년 영국에서 냉장고를 사용하지 않고 백신을 보관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이 기술이 나타나기 전에는 전기가 공급되지 않는 개발도상국가의 아이들에게 백신을 안전하게 전달하기 어려웠다. 이 기술 덕분에 가난한 나라의 아이들을 질병에서 보호할 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가의 의료 비용도 연간 2억~3억 달러 정도의 절감효과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완보동물(緩步動物)에서 영감을 얻어 이 기술을 개발했다.
전 세계의 늪에 서식하는 무척추동물인 완보동물은 길이가 1mm 정도인 작은 생물인데 생김새가 곰을 닮아 물곰이라 불리기도 한다. 물방울 속에 사는 물곰은 물이 말라 움츠러들면 생명 활동이 일시적으로 멈추는 가사(假死) 상태에 빠진다. 이 상태에서 물곰은 물이 끓는 섭씨 100도 이상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고 결빙 온도보다 훨씬 낮은 섭씨 영하 200도에서도 얼어 죽지 않는다. 완보동물이 극한 환경에서 생존할 수 있는 것은 특수한 물질이 몸 안에서 생성되기 때문이다. 이 특수물질을 모방하여 냉동시설 없이도 의약품이나 식료품을 보존하는 기술이 개발된 것이다. 이 기술을 활용하면 냉동시설에 전기를 공급하는 데 소요되는 수억 달러의 에너지 비용을 낭비할 필요가 없어질 뿐만 아니라 냉동시설에서 배출되는 온실효과 기체의 양을 감소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전 세계 냉동시설에서 뿜어내는 이산화탄소는 온실효과 기체 전체 배출량의 20%를 점유할 정도로 그 비중이 크다. 또한 이 기술은 훗날 우주 공간으로 여행을 떠날 때 극한 환경에서 건강을 유지하는 데 크게 보탬이 될 전망이다.
거북복의 외형을 모방해 만든 메르세데스 벤츠. |
생물로부터 영감을 얻거나 생물을 모방해 창조된 역사적 발명품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화가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새의 날개와 꼬리 모습을 본떠 그린 비행기 설계도를 100여 개나 남겼다. 그의 헬리콥터 설계도는 훗날 실제로 구현되었다.
나노기술과 생물모방 로봇
게코 발가락의 나노 빨판. |
하나는 나노기술의 발달이다. 생물의 구조와 기능을 나노미터, 곧 10억 분의 1m 수준에서 파악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생물을 본뜬 물질을 분자 수준에서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분자생물모방학(molecular biomimetics)의 출현으로 가령 도마뱀붙이(게코) 발가락의 빨판이나 연잎 표면의 돌기처럼 나노 크기의 조직들을 흉내 낸 새로운 소재가 잇따라 개발되었다.
야행성 동물인 게코는 몸길이가 꼬리를 포함해 30~50cm, 몸무게는 4~5kg 정도인 작지 않은 동물이지만 파리 따위의 곤충처럼 벽을 따라 기어올라가는가 하면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걷기도 한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거스르는 게코의 능력은 발가락 바닥의 특수한 구조에서 비롯된 것으로 밝혀졌다. 게코 발가락 바닥에는 사람의 손금처럼 작은 주름이 새겨져 있는데, 이 작은 주름들은 뻣뻣한 털(강모)로 덮여 있다. 작은 빗자루처럼 생긴 강모의 끝에는 잔가지가 나와 있다. 잔가지의 끝 부분은 오징어나 거머리의 빨판처럼 뭉툭하게 생겼으며 지름은 200nm 정도이다. 도마뱀붙이는 이런 나노 빨판을 10억 개나 갖고 있다.
요컨대 발가락의 나노 빨판 덕분에 게코는 벽이나 천장에서 밑으로 떨어지지 않고 기어다닐 수 있는 것이다. 게코의 강모가 모두 동시에 접착을 한다면 몸무게가 120kg인 사람을 지탱할 수 있다. 2004년 게코의 나노 빨판을 모방한 접착제가 개발되었다.
연못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연(蓮)도 생물영감의 한 사례이다. 연은 진흙 속에 뿌리를 박고 자라지만 흐린 물 위로 항상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잎사귀는 항상 깨끗하다. 비가 내리면 물방울이 잎을 적시지 않고 주르르 흘러내리면서 잎에 묻은 먼지나 오염물질을 쓸어낸다. 연의 잎사귀가 물에 젖지 않고 언제나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는 자기정화 현상을 연잎효과(lotus effect)라고 한다.
독일의 식물학자인 빌헬름 바르트로트는 연잎의 표면이 작은 돌기로 덮여 있고 이 돌기의 표면은 티끌처럼 작은 솜털로 덮여 있기 때문에 연잎효과가 발생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1999년 연잎 표면을 뒤덮은 나노돌기의 자기정화 기능을 활용한 첫 번째 제품을 상용화했다. 건물 외벽에 바르는 자기정화 페인트이다. 때가 끼는 것을 막아주는 자기정화 유리는 자동차, 태양전지, 건물, 플라스틱 용기 등에 쓰임새가 많다. 연잎효과를 응용한 옷은 가령 음식 국물을 흘리더라도 손으로 톡톡 털어버리면 깨끗해진다.
자연중심 기술에 주목하는 두 번째 이유는 생물모방 로봇의 개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동물로봇공학(zoobotics)은 공룡·긴팔원숭이·뱀·바닷가재·참치처럼 큰 동물부터 거미·지네·바퀴벌레·호랑나비·파리·메뚜기·벌새처럼 작은 동물까지 모방해서 다양한 로봇을 개발한다. 특히 생물모방 초소형 비행로봇과 소프트로봇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새나 곤충의 비행원리를 모방하는 초소형 비행체(micro air vehicle·MAV)의 대표적인 사례는 벌새로봇과 파리로봇이다. MAV는 길이, 날개 폭, 높이가 모두 15cm 이하인 비행로봇이다. 2011년 미국에서 개발된 벌새로봇은 무게 19g, 날개 길이 160mm이다. 벌새는 몸길이가 8.4cm인 가장 작은 새로 초당 60~80회의 날갯짓으로 비행한다. 2013년 5월 미국 하버드대학이 선보인 파리로봇은 길이 30mm, 무게 80mg의 세계 최소 비행로봇으로 초당 120회 날갯짓을 한다. 초소형 비행체는 드론(drone)처럼 활용되어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재난 현장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수행할 전망이다.
소프트로봇 또는 연체로봇(soft-bodied robot)은 문어처럼 뼈가 없는 연체동물을 본뜬 로봇이다. 문어는 8개 다리의 빨판으로 물체를 움켜잡고, 3m의 몸을 변형해 몸 크기보다 작은 구멍 속을 통과한다. 이탈리아 연구진은 문어로봇, 하버드대학에서는 연체동물처럼 스스로 형태를 변환하는 로봇을 개발하고 있다.
흰개미둥지와 이스트게이트. |
자연중심 기술은 에너지 문제의 해결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흰개미 둔덕에서 영감을 얻어 건축 된 이스트게이트센터(Eastgate Center)이다. 나미비아, 우간다, 호주의 초원에는 흰개미가 진흙 알갱이로 쌓아올린 둔덕이 널려 있다. 둔덕 안에는 흰개미 군체의 보금자리인 둥지가 있다. 둥지 안에서는 흰개미 수십만 마리가 엄청난 양의 산소를 소비하여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면서 동시에 열을 발생시킨다. 열과 이산화탄소가 뒤섞인 뜨거운 공기는 둥지 안에 수직으로 뻗어 있는 커다란 굴뚝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가면서 둥지 안의 온도는 낮아진다. 한편 둔덕 바깥에서 바람이 불면 찬 공기가 지표면 바로 아래에 있는 관을 통해 둥지 밑으로 들어와서 더운 공기를 위로 밀어올려 바깥으로 나가도록 한다.
흰개미 집은 어느 곳, 어떤 기후에서도 온도는 섭씨 27도, 습도는 60%를 유지한다. 1996년 짐바브웨 수도에 건설된 이스트게이트센터는 무더운 아프리카 날씨에 냉난방 장치 없이도 쾌적한 상태가 유지된다. 건물 바깥 온도가 섭씨 5도에서 33도 사이를 큰 폭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동안에도 실내 온도는 섭씨 21~25도로 유지된다. 이스트게이트센터는 전기로 냉난방을 하는 건물에 견주어 에너지 사용량이 10%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재닌 베니어스는 《생물모방》에서 자연중심 기술에 대해 “전 지구적인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지름길"이라며 “생물들은 화석연료를 고갈시키지 않고 지구를 오염시키지도 않으며 미래를 저당잡히지 않고도 지금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전부 해왔다. 이보다 더 좋은 모델이 어디에 있겠는가"라고 했다.
청색경제의 浮上
미국의 생물학 저술가 재닌 베니어스(왼쪽)와 벨기에 출신의 환경운동가 군터 파울리. |
이런 맥락에서 자연중심 기술이 발전하면 녹색경제의 대안으로 청색경제(blue economy) 시대가 개막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망된다. 2008년 10월 스페인에서 열린 세계자연보전연맹(IUCN)회의에서 ‘자연의 100대 혁신기술(Nature’s 100 Best)’이라 불리는 보고서가 발표되었다. 세계자연보존연맹과 유엔환경계획(UNEP)의 후원을 받아 마련된 이 보고서는 생물로부터 영감을 얻거나 생물을 모방한 2100개 기술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100가지 혁신기술을 선정하여 수록한 것이다.
이 보고서를 만든 사람은 재닌 베니어스와 군터 파울리이다. 파울리는 벨기에 출신의 환경운동가이다. 2009년 5월 베니어스와 파울리는 이 보고서를 같은 제목의 책으로 발간했다.
2010년 6월 파울리는 자연의 100대 혁신 기술을 경제적 측면에서 조명한 저서인 《청색경제》를 펴냈다. 이 책의 부제는 ‘10년 안에, 100가지의 혁신 기술로, 1억 개의 일자리가 생긴다(10 years, 100 innovations, 100 million jobs)’이다. 파울리는 이 책에서 100가지 자연중심 기술로 2020년까지 10년 동안 1억 개의 청색 일자리가 창출되는 사례의 밑그림을 제시했다. 이 100가지 사례를 통해, 자연의 창조성과 적응력을 활용하는 청색경제 바람이 전 세계적으로 불면 자연중심 기술로 인류가 당면한 환경위기를 극복하여 지속가능한 자연중심의 경제가 실현될 뿐만 아니라 고용 창출 측면에서도 매우 인상적인 규모의 잠재력을 갖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자연은 위대한 스승이다》에서 자연중심 기술을 ‘청색기술(blue technology)’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불러도 좋을 것 같다고 제안한 바 있다.
청색기술이 발전하면 기존 과학기술의 틀에 갇힌 녹색성장의 한계를 뛰어넘는 청색성장으로 젊은이들의 일자리를 창출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청색기술은 명실상부한 블루 오션(blue ocean)임에 틀림없다.
자연의 지혜를 배우면 지구를 환경위기로부터 구해낼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은 청색기술을 단순히 과학기술의 하나로 여기지 않고 인류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담보하는 혁신적인 패러다임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니까 청색기술은 21세기 인류사회의 새로운 도전이자 희망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