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는 달린다. 문산역에서 서울역까지, 혹은 운정역을 거쳐 용문역까지. 기적은 울리지 않는다. 여음도 남지 않는다. 더 이상 화차(火車)도 아니고 디젤 열차도 아닌 경의중앙선 전철은 오늘도 달린다. 새벽비가 오든 말든 열차는 달리지만, 이제 플랫폼은 이별을 고하는 슬픔도 비장함도 없다.
새벽비가 주룩주룩 철길을 적시네.
새벽비가 주룩주룩 지붕을 적시네.
삑삑 삑삑 기적이 울리면 이제 정말 나는 갑니다.
- 길옥윤(1927-1995) 작사ㆍ작곡, 「새벽비」 중에서
아침부터 한밤까지 거대 도시 서울을 왕복하는 일상적 출퇴근이 있을 뿐이다. 신도시 혹은 베드타운 운정(雲井)을 오가는 사람들은 이별가이자 사랑가인 가수 혜은이의 「새벽비」와는 상관없이 그저 무표정하기만 하다. 문산과 파주와 운정만 아니라 탄현, 일산, 백마, 대곡, 능곡, 행신, 화전까지 모두 무표정하다.
이른 아침 새들이 소리를 지우며 날아가는 먼 하늘로 이어폰을 귀에 꽂은 청년들의 이미지가 겹쳐진다. 붉은 저녁을 배경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중년 여성의 손목도 차창에 겹쳐진다. 아침저녁으로 전철만 줄지어 달리는 게 아니다. 서로 귀를 막은 사람들도 줄을 서서 달린다. 열차는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 하지 않는 사람들의 안녕을 지키며, 그 가족의 작은 소망들까지 연결해 주는 列車인지 모른다.
하지만 엊그제 운정으로 집을 옮긴 사람은 다르다. 정해진 출퇴근이 아니라 자유로운 이동의 행복감을 누리는 사람은 오히려 「새벽비」의 기적 소리와 여음을 모두 듣는다. 비록 자유의 바로 등 뒤에서 울리는 경고음을 운명처럼 품에 안고 가지만, 운정역에서 서울역까지 덜컹거리는 율동감은 상념(想念)의 박자가 되어 ‘삑삑 삑삑’ 흥겹게 달려가게 만든다.
만일 ‘별다방 미스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스타벅스와 커피빈과 폴바셋과 엔제리너스만이 아니라 별다방과 미스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놀랄 것이다. 별다방과 행운다방과 역전다방을 다니던 사람들이 미스리와 미스김과 미스박이 따라주는 밀크커피를 마실 때 그 곁에서 ‘오늘의 운세’를 펼쳐 보았던 사람은 정말 놀랄 것이다. 더 이상 기적을 울리지 않는 열차를 두 시간 가까이 타고 서울 도심에 도착한 그가 앉은 찻집이 ‘별다방 미스리’라는 사실에.
그는 또한 놀랄 것이다. ‘별다방 미스리’를 찾는 사람들은 결코 중년이 아니라는 사실에. 그들은 한눈에도 앳돼 보이는 투명하고 흰 얼굴에다 푸르고 붉은 입술과 손톱과 손목과 발목을 가진 청년들이었다. 자신들의 어버이가 어릴 적 학교 앞에서나 먹었을 온갖 불량식품을 배경으로 벤또(도시락)를 뒤흔들어 밥과 반찬을 섞는 이들의 활기찬 웃음과 넘치는 생의 에너지는 별다방도 미스리도 더 이상 퀴퀴한 옛 사진이 아니게 만든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를 놀라게 하는 것은 찻집을 빈틈없이 메우고 있는 쪽지들이었다. “이승우(축구선수)를 여행 중에 만나 계속 마주치고, 때마침 흰 티를 입고 있어 싸인 받고 사진 찍게 해주세요."라는 쪽지와 “사랑한지 벌서 972일째."라는 쪽지는 “See you here, Again!!"이라는 쪽지 사이에 있다. “매장이 커져서 월급 오르길…", “부족하더라도 살고 싶다.", “오늘은 감사!", “희망, 희망, 희망…"
의자와 탁자를 빼고 주방과 계산대를 제외하고, 벽면과 천정과 장식용 전등갓과 모든 설치물들에 쪽지들이 가득 가득했다. 청년들의 빈틈없는 소망들은 별다방과 미스리를 다시 한 번 중년의 과거 시제가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있는 현재로 만드는 일종의 통지문처럼 보였다. 바람의 항상성과 기원(祈願)의 보편성 사이를 가득 채우고 있는 쪽지들은 번화한 서울 도심의 놀라운 표정이 아닐 수 없었다.
더 이상 기적을 울리지 않는 열차는 날마다 문산과 파주와 운정과 탄현, 일산, 백마, 대곡, 능곡, 행신, 화전의 무표정한 출퇴근을 가능하게 한다. 이제는 서로의 안부를 묻지 않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귀를 막고 희망을 외친다. 열차는 달린다. 열차에 실려 무표정하게 달려가는 희망과 쪽지에 적혀 빼곡이 미래를 엿보는 문자들 사이에 영원히 변치 않는 오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