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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목일을 맞아 그의 무덤에 또 다시 꽃이 피다!

한국의 山과 民藝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日本人, 아사카와 다쿠미

글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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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카와 다쿠미의 묘지. 올해는 추모식을 열지 않고 추모화환으로 대신했다. 사진=장상인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망우리 공원’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1891-1931)의 공덕의 묘(淺川巧功德之墓)에 있는 비문이다. 묘지 오른 쪽에는 그가 생전에 좋아했던 도자기 형상의 석조물이 서있다.
그의 89주기를 맞아 추모화환들도 놓여 있었다. 문화유산국민신탁 김종규 이사장, 수림문화 재단 유진룡 이사장, 문화재청 정재숙 청장 등이 보내온 화환이었다.
 
“코로나19 여파로 올해는 추모식을 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문화계를 대표하는 분들이 화환을 보내주셔서 놀랐습니다."
 
해마다 추모식을 주관하는 아사카와 노리타가·다쿠미형제 현창회(회장 조만제)의 사무총장 노치환(57)씨의 말이다. 특히, 정재숙 문화재청장이 보낸 화환은 그동안 없었던 정부기관 최초의 것으로서 의미가 있어 보였다. 현창회(顯彰會)에는 한국인뿐만 아니라 일본인들도 회원으로 가입하고 있다. 몇 해 전부터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마무라 게이코(今村圭子·62)씨는 미소를 띠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양국의 관계가 경색된 가운데서도 일본인을 추모하고, 묘지를 관리해주시는 한국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현창회에 참여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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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카와의 묘지를 찾은 일본인 이마무라 게이코(왼쪽)와 호소카와 아케미 씨.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그는 누구인가
  
 일제 강점기 시절 임업시험장 재직 중 시험 연구 분야에 여러 중요 업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모든 것을 한국인의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했고 불운한 한국인을 도와주는 등 당시 한국인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런 이유로 다쿠미(巧)는 한국인을 가장 인격적으로 대우해 준 특별한 일본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조선어를 열심히 공부했고 한복을 입었다.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였다.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도 진급에 관심이 없었다. 단지 양묘(養苗) 그 자체를 좋아했고, 또 그 일에만 열정을 쏟았다.
 
‘어떻게 하면 황폐된 조선의 산이 푸르게 될 수 있을까?’
 
기후나 토질을 잘 파악해야한다. 인간의 억지(抑止)에 의해서는 조림에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27년 <조선 산림회보> 7월호에 발표한 ‘민둥산 이용에 대해서’의 주제 발표에는 그의 조림(造林) 철학이 담겨 있다.
 
<자연은 항상 나쁜 것 속에 좋은 것을 감추고 있다. 고통 뒤에는 즐거움이 온다. 이렇듯 화(禍)를 복(福)으로 바꾸는 자연의 원리를 산업에 적용한 것이 바로 재활용이다.>
 
지극히 맞는 말이다. 사람들이 자연의 좋은 것을 외면하다가 화(禍)를 당하고 있으니 말이다. 다쿠미가 하는 일 중에서 큰 몫을 차지했던 것이 또 있었다. 다름 아닌 전국 순회강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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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카와의 고향(北杜市) 자료관에 있는 아사카와 다쿠미의 인생 기록
그는 아직은 추운 이른 봄 2월부터 3월에 걸쳐 전국을 돌며 양묘법(養苗法)에 대한 강연을 하고 다녔다. 2월 17일 부산, 3월 12일 충북 청주에서 강연을 하고 3월 15일 경성(서울)으로 돌아왔을 때 감기에 걸렸다.
 
그런 가운데서도 3월 18일 감리교 서부 집회에 참석했고, 3월 26일 전국 각지에서 촬영한 양묘에 관한 사진 자료로 전시회를 열었다. 안타깝게도 전시회를 연 다음 날인 3월 27일 급성 폐렴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요즈음이라면 코로나19 확진자 대열에 합류했을 것이다. 1931년 4월 2일 밤, 다쿠미는 이 세상과 작별하고 말았다. 아직은 청춘인 40세였다.
  
폭우 속 장례식에 조선인들 운집해
 
다쿠미의 장례식은 4월 4일 임업시험장 앞 광장에서 치러졌다. 그날은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다. 그런데도 ‘다쿠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조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의 시신을 보고 통곡한 조선인들이 얼마나 많았던지...조선인과 일본인의 반목이 심하던 당시의 상황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장면이 속출했다.
 
“저도 다쿠미 씨의 시신을 운구하겠습니다."
“여기에서 노제(路祭)를 올리게 해주시오."
  
다쿠미는 자신이 사랑한 조선옷을 입은 채 조선인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토록 살벌한 식민 통치의 속에서도 조선 사람들의 사랑을 흠뻑 받으며 조선의 흙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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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도자의 역사: 아사카와 다쿠미의 고향 자료관에서 촬영

더불어 그의 친형 아사카와 노리타카(淺川伯敎, 1888-1964)는 1931년 초등학교 미술교사로 경성(서울)에 부임해서 조선의 700여 가마터와 폐사지를 답사하면서 <조선도자사>를 정립한 인물이다. 당대 조선 최고의 한국도자기 전문가였다. 아사카와형제 현창회 이동식씨-전 KBS 해설위원장-의 말이다.
 
“그 때는 암울했던 신민통치 시대 아닙니까? 아사카와 형제는 조선인들에게 빛과 같은 존재였을 것입니다. 저희 현창회는 두 형제의 뜻을 기리기 위한 순수한 민간 모임입니다."   

 
한·일 관계는 서로 다른 정치적인 목적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 내면에 흐르는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이 자리하고 있어야 한다.
 
망우리 공원 30,000여 기(基)의 묘지에는 계용묵·김말봉·안창호·이중섭·장덕수·조봉암·지석영 선생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근현대사의 대표적 인물들이 잠들어 있다. 이들의 묘지들과 섞여 있는 아사카와 다쿠미의 묘소가 진정한 한일 관계의 표본일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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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카와 다쿠미와 윤동주(일본인들이 운영하는 도쿄의 고려박물관), 이바라키 노리코의 ‘한글로의 여행’ 표지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와 아사카와 다쿠미   

   
일본의 유명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茨木則子, 1926-2006)가 쓴 <하나의 줄기 위에>라는 수필에는 ‘윤동주에 대하여’라는 글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청춘의 시인’ 윤동주―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인기 있는 시인. 수난의 심벌, 순결의 심벌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장본인. 일본유학 중 독립운동의 혐의로 체포되어 1945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7세의 나이로 옥사(獄死)한 사람. 옥사의 진상도 의문이 많다. 일본의 젊은 간수는 윤동주가 사망 당시,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고 했다.>
 
이바라기 노리코의 <한글로의 여행>은 또 다른 측면에서 가슴에 와 닿는다. 시인의 한국과 한글에 대한 사랑이 철철 넘쳐나기 때문이다.
 
<‘한국어를 배우고 있습니다’라고 하면 사람들(일본인)사이에서 나타나는 반응은 판에 박힌 듯 정해져 있다.
“왜 하필 한국말을..."
“특별한 동기라도 있나요?"
그저 이웃나라의 말을 배우는 것뿐인데, 너 나 할 것 없이 의아하게 생각한다.>
  
뒤늦게 한글을 배운 이바라기 시인이 아사카와 다쿠미를 알게 된 배경과 그의 묘지를 찾아가는 과정이 특별하다. 책 속으로 들어가 본다.
  
<아사카와 다쿠미라는 일본인은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다. 스물셋에 건너가 마흔에 죽을 때까지 17년간 조선의 바지저고리를 애용하고 당나귀를 타고 다녀서 당시, ‘저 조선인은 일본어가 능숙해요.’ 라고 일본인에게까지 오해받을 정도였다.>
 
<“이봐! 조센징, 비켜!"
일본인이 호통을 치면 아사카와 다쿠미는 별 대꾸를 하지 않고 묵묵히 길을 비켰다고 한다. 소나무나 포플러나무들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아무 편견도 없는 눈(目)으로 사람들을 볼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 눈으로 보면 조선 민족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으리라. 말이 통했던 것도 큰 요소 중의 하나였음에 틀림없다.>
 
학력도 높지 않고 월급도 그리 많지 않았을 텐데, 곤궁한 사람들을 많이 도왔으며, 학비를 원조한 아이들도 많았단다.
 
시인은 어느 날 임업 시험장 직원의 안내를 받아서 망우리에 있는 아사카와 다쿠미의 묘소를 찾았다.
 
시인은 묘지에서 ‘아사카와 다쿠미는 한강이 여유롭게 구불구불 흘러가는 곳에 있으나 가족들의 묘소는 제각각 일본의 다른 곳에서 잠들어 있다’고 썼다.
 
“그의 영혼은 쉽게 빠져나와 현해탄을 건너 유유히 일본에도 놀러 갈 것이다. 그리고 사키코 부인도, 따님인 소노에 씨도 까다로운 여권과 비자 없이 망우리에 놀러 오겠지."
 
시인다운 묘사다. 현해탄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영혼들의 유영(遊泳)-한·일 우호의 진정한 모델이 아닌가.
 
이바라기(茨木) 시인은 ‘다쿠미 씨는 가시적인 정치 활동을 해서 조선 민족에게 힘을 보태준 것이 아니라, 말을 삼가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조선 민족에게 최선을 다한 그의 삶에 어쩔 수 없는 매력을 느꼈다’고 했다. 그의 인간미에 매료된 것이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한 뒤 일제 강점기에 쌓인 원망으로 일본인의 묘지를 발로 차고 파헤치려는 과격한 심정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지만, 아사카와 다쿠미 선생님의 묘지는 예외였습니다. 모두 함께 지키고 섬겨 왔습니다."
 
이바라기 시인은 ‘임업 시험장 직원의 말에 놀랐다. 그리고, 84세인 김이만 할아버지의 말에 다시 한 번 놀랐다’고 했다.
 
“다쿠미 선생은 조선인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사람이었어. 묘지는 임업시험장 직원들이 돈을 모아서 건립했지."  
 
 

 

[입력 : 2020-04-06]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more 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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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30년 넘게 현해탄을 넘나들며 일본인들과 교류하고 있는 홍보컨설팅회사 JSI파트너스의 대표다. 일본비즈니스 전문가로도 정명이 나있다. 동국대를 졸업하고 육군 제2훈련소 교관(ROTC11기)으로 군(軍) 복무했다. 직장생활의 대부분을 대우에서 보냈다. 대우건설 재직시절 철옹성 일본 건설시장의 문을 열었다. 대우건설 문화홍보실장(상무)에 이어 팬택계열 기획홍보실장(전무)을 역임했다. 2008년부터 지금의 JSI 파트너스 대표이사로 있다. 일본의 정계·관계·업계·언론계 등 두터운 인맥을 갖고 있다. 한편 비즈니스를 하면서도 칼럼니스트로 여러 매체에 일본 관련 글을 쓰고 있다. 특히 일본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면서 현장을 직접 보고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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