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예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죽음을 두고 한 ‘예의’ 논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최근 SM C&C 플랫폼 '틸리언 프로(Tillion Pro)'에 의뢰해 20~60대 성인 남녀 5051명에게 '예의란 무엇인가'를 물었고 전문가 분석도 곁들였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나는 예의 바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48.3%가 '그렇다'고 답했다. '아니다'는 7.7%에 불과했다.
"평균적으로 남들은 예의 바르다고 생각하는가"라는 물음엔 '그렇다'가 28.9%로 급감했다. '아니다'는 14.5%. 나는 예의를 지키는데 상대적으로 남들은 무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고 평가할 수 있다.
타인과 자신에게 이중 잣대를 적용하는 데 대해 동양철학 전문가들은 '예의의 주객전도'를 꼽았다. "예의의 주체는 나이고 객체는 상대방이어야 하는데, 역으로 상대가 나에게 먼저 베풀어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전광진 성균관대 중문과 교수는 "예의의 핵심은 상대방 배려"라는 점을 주목하라고 했다. 예의의 무게중심은 상대방에게 있다고 한다.
"한국 사회에서 예의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잣대(복수 응답)"에 대한 질문에서 나이(63.0%), 상사 등 직장 내 권력 관계(46.9%), 비즈니스나 서비스에서 갑을 관계(39.5%), 성별(26.4%) 순으로 나타났다.
"한국 사회에서 예의의 잣대가 공평하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아니다(47.7%)가 그렇다(8.4%)보다 월등히 많았다. "당신을 화나게 하는 무례한 태도(복수 응답)"로는 매너 없음(58.7%)이 가장 많았다. 다음이 욕설(52.8%), 무시(49.8%) 질서를 지키지 않는 태도(45.7%), 꼰대 같은 태도(35.9%) 순으로 나타났다. 20대에선 매너 없음(55.4%)이 가장 많았고 다음이 꼰대 같은 태도(53.1%)였다.
"나는 예의 바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질문에 '아니다'라고 응답한 비율이 15.5%였다. 전 세대 평균(7.7%)의 2배였다. "남들은 예의 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도 '아니다'가 20.8%로 평균(14.5%)보다 많았다. 다른 집단보다 자신도 예의 없고, 남들도 예의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조선일보는 분석했다.
'80년생 김 팀장과 90년생 이 대리가 웃으며 일하는 법'의 저자 김범준 작가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밀레니얼이 나와 타인에 대한 예의 수준에 박한 점수를 주는 것은 그만큼 예의에 민감하다는 뜻"이라면서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의 예의에 관심을 둘 줄 아는 이들의 등장은 나와 타인에게 함부로 거칠게 굴었던 과거 세대와 결별함을 의미하기 때문에 희망적으로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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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에 영향을 미치는 잣대"로도 다른 세대는 나이, 권력 관계, 갑을 관계, 성별 순이었지만 20대 남성은 나이, 권력 관계, 성별, 갑을 관계 순으로 꼽았다. 성별이 예의에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이 상대적으로 크다. 리더십 코칭 전문가 김현정 숭실대 겸임교수는 "20대 남성이 페미니즘 영향으로 성 인지 감수성이 다른 세대보다 높은 점이 반영된 듯하다"고 했다.
'예의란 무엇인가'(주관식)라는 질문의 답에선 세대 차가 뚜렷이 드러났다. "아랫사람이든 윗사람이든 공평하게 대하는 태도" "성별, 나이, 직위에 상관없이 동등하게 대하는 것" "선을 지키는 것"…. 2030 응답자의 답이다. '동등' '공평' '나이와 상관없이' '선' 같은 단어가 많이 등장했다. 반면 5060세대에선 '어른 공경' '인사' '예절' '공중도덕' 등이 주요 키워드였다. '수직적 예의'에서 '수평적 예의'로 점차 예의의 결이 바뀌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현정 교수는 "세대에 따라 예의의 개념 자체가 바뀌고 있다. 밀레니얼 세대는 나이, 권력에 따른 예절 개념이 아니라 인권, 평등, 인격 존중 등을 예의로 바라본다. '종래의 예의를 따르는 것이 좋은 건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한다"고 말했다.
조직 내에서도 예의를 둘러싼 인식 차가 드러난다. 김 교수는 '선(線) 지키기'를 대표적인 예로 들었다. "밀레니얼 직원은 사생활을 침범하지 않기 위해 '선을 지키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고, 기성세대에선 '선=장벽'이라고 생각해 선을 걷어내고 챙겨주는 게 예의라고 생각한다. 한쪽에선 선을 사수하고, 한쪽에선 걷어내려고 눈에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을 한다." 김범준 작가는 "밀레니얼은 '다름'을 '틀림'으로 알고 가르치려 드는 것을 예의 없다고 생각한다"며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밀레니얼 예법에서 중요한 요소"라고 했다.
예의에 관한 세대 간 인식 차가 영원히 평행선 달리는 기찻길은 아닐 듯하다. 소수 의견이지만, 60대에서 "아랫사람과 모르는 사람에게 막 대하지 않는 것" "어른을 공경하고 나보다 젊은 사람을 무시하지 않는 것"으로 예의를 정의하는 응답자가 있었다. 꼰대 강박 시달리는 60대의 예의다.
성인 5051명 설문… 예의란 무엇인가
예의와 무례를 알고 싶다? 지금 당장 운전대를 잡아라
살아 있는 예의 참고서, 도로 위
양보받은 운전자가 '3중 감사'를 해 화제가 된 영상.
양보받은 운전자가 '3중 감사'를 해 화제가 된 영상. /한문철 TV 캡처
지난달 23일 교통사고 전문 한문철 변호사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한문철TV'에 '운전 26년 만에 처음입니다'라는 제목의 블랙박스 영상이 올라왔다. 교통사고 영상이냐고? 반대다.
영상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운전자 A가 주차장에서 나와 대로로 끼어드는 차에 양보를 해주자 상대차 운전자 B가 운전석에 앉은 채 90도 인사를 했다. 그 모습을 본 A는 반사적으로 90도 인사로 답례했다. 이를 본 B는 또 90도로 고개 숙이고, 완전히 도로에 들어선 다음엔 비상등을 켜 재차 고마움을 표시했다. 90도 인사 두 번과 비상등 인사, '3중 감사' 표시를 한 셈이다.
지금까지 조회 수 235만, '좋아요' 1만9000여 회를 기록하는 등 반응이 뜨겁다. 그렇게 감동할 만한 일인가 고개 갸우뚱할 수도 있겠다. 도로 위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국에서 예의 사각지대를 꼽자면 빠질 수 없는 곳이 도로 위다. 무법자, 얌체가 판친다. 한문철 변호사는 "운전대만 잡으면 사람들이 로보캅, 로보트 태권브이로 변한다. 갑자기 수퍼파워를 가지기라도 한 것처럼 순한 사람도 난폭해진다"고 했다. 무례가 난무하는 이 공간은 한국 사회의 축소판. 운전 예의를 보면 우리 인생에 적용할 만한 원칙이 보인다.
한 변호사는 "한마디로 운전 예의의 핵심은 존중과 배려"라고 했다. '틸리언' 설문 중 주관식 문항 '예의란 무엇인가'에서 응답자들이 많이 언급한 단어 1, 2위도 존중(1229회)과 배려(969회)였다. 한 변호사는 "배려와 존중의 원천은 여유라고 본다. 결국 예의는 여유에서 나온다"고 했다.
설문에서 "예의 없는 사람에겐 예의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답한 사람이 67.5%였다. 자연스레 예의 없는 운전자에게 보복 운전으로 응징한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보복 운전 범죄는 2018년 4403건. 하루 평균 12건이 발생했다. '무례의 악순환'이 만든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초상이다.
운전 예의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 또 하나. "화내는 사람이 반드시 진다." 한 변호사는 "언성을 높여 봐야 상대만 자극한다.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소리치는 것은 원시 시대 대응법. 앞에서 예의는 차리고 블랙박스에 찍힌 화면을 '스마트 국민제보' 등에 증거 제출하면 된다"고 했다. 그래도 고정관념을 완전히 떨치긴 어려운 걸까. "예의를 차리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는가"라는 물음에 응답자 21.6%가 그렇다고 답했다.
또 하나 '나이는 벼슬이 아니다' 란 점. 나이 들이밀기, 반말하기는 운전 예절에서 금기 사항이다. 한 변호사는 "가벼운 승강이로 끝날 일이 반말 때문에 감정싸움으로 번져 일이 커질 때가 많다. '뭐 하자는 겁니까' '뭐? 야, 너 몇 살이야?' '야? 당신은 몇 살인데?' '당신? 어린놈이'…. 전형적 패턴 아닌가. 모든 사람을 인격체로 대해야 한다." 도로 위는 살아있는 예의 참고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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