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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에게 돌아간 평생 동반자’ 이희호의 삶

“김대중 없이 이희호 없고, 이희호 없이 김대중 없다”...1962년 DJ와 결혼, 평생 정치적 동반자, 미국 유학까지 한 촉망받던 여성 사회운동가

글  김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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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인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가 6월 10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7세. 그래픽=뉴시스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의 평생 동반자였던 이희호 여사가 10일 오후 11시 37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 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7세. 김대중평화센터 측은 "이 여사가 오늘 오후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하셨다"고 전했다.
 
김 전 대통령은 스스로를 '이희호 남편'이라 칭할 만큼 둘의 관계는 부부라기보다 '동지' '동업자'에 가까웠다. 김 전 대통령은 미국에서 망명하던 시절인 1983년 샌프란시스코의 한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내가 없었더라면 내가 오늘날 무엇이 되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내가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은 내 아내 덕분이고, 나는 이희호의 남편으로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1922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 여사는 이화여고와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서 교육학을 전공했다. 6·25전쟁 뒤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국내에서 여성운동가로서 여성인권운동을 이끌었다.
 
6·25전쟁 당시 부산에 피난을 갔던 이희호는 이곳에서 대한여자청년단을 만들었다. 이희호는 이 무렵부터 여성이 주체가 되는 사회운동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1952년에는 대한여자청년단에 이어 여성문제연구원도 창립했다. 서울대생 모임이었던 면학동지회 역시 1951년 부산에서 다시 회동했다. 한 달에 한 번 만나던 이 모임에서 이희호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처음 만났다.
 
1954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후 석사과정까지 마치고 1958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고국으로 돌아온 이희호는 모교였던 이화여대에 둥지를 틀고 기독교사회사업학과에서 사회학 원서 강독을 했다. 대학교수를 희망했던 이희호는 YWCA(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 측으로부터 총무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YWCA에서 중추적인 활동을 하며 사회운동가로의 명성을 쌓아갔다.
 
김대중을 다시 만난 건 1961년이었다. 김대중은 당시 첫 부인이던 차용애를 먼저 떠나보낸 상태였다. 당시 5·16 쿠데타로 의원직을 잃은 '정치 실업자' 김대중과 YWCA 총무였던 이희호는 주로 정치 이야기를 하며 가까워졌다.
  
김대중과 이희호는 1962년 결혼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이 재혼인 데다가 5·16 군사 쿠데타로 정치생명을 잃었기에 주변에서 결혼을 반대했다고 한다. 정치 낭인이었던 김대중의 앞길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을 눈엣가시처럼 생각했다. 결혼식을 마치고 열흘 뒤 김대중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갈 정도였다. 평생을 김대중의 정치적 동반자로 산 이희호의 고난은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정치인 김대중의 뒷바라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이희호는 사회운동가로서의 삶은 접게 된다. 이희호가 기억하는 가장 고된 선거는 1967년 총선이었다. 주위에서는 지방 지역구는 부정선거가 이뤄지기 쉽다며 김대중의 목포 출마를 만류했다. 하지만 결국 김대중은 목포 출마를 결심했다. 이희호도 나서 지원했다.
 
1970년 김대중은 처음으로 대선(大選)에 나갈 결심을 했다. ‘40대(代) 기수’로 나서겠다는 것이었다. 인기는 날이 갈수록 올라갔다. 부산 연설에는 50만 명의 시민이 몰렸다. 김대중이 하루에 열 차례가 넘는 연설을 하면 이희호 역시 전국의 장터와 거리를 돌며 남편을 도왔다. 이희호는 찬조연사로 나서 시민들에게 "제 남편이 대통령이 돼 독재를 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4월 18일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열린 김대중의 유세에는 100만 인파가 모여들었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이 민주화 투쟁 일선에 나설 때 정신적 지주로서 그를 지지했다. 이들의 힘든 여정은 1971년 김 전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과 붙은 대선에서 46% 득표로 선전했지만 낙선하면서 시작됐다.
   
1972년 유신이 시작되면서 김 전 대통령은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이 여사는 당시 정보기관의 감시를 피해 김 전 대통령에게 "더 강한 투쟁을 하시라"며 그를 지지하기도 했다. 1973년에는 '김대중 도쿄납치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이 죽음의 문턱까지 가게 된 큰 시련이 왔지만, 이 여사의 ‘존재’로 이겨냈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이 정치 활동을 금지 당하고 가택연금, 옥고를 치르면서 이 여사도 함께 고난의 시간을 보내게 됐다.
   
1979년 10·26으로 박정희 정부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신군부가 등장했다. 당시 김대중은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 휘말리게 됐다. 김대중에게는 사형이 선고됐다. 장남 김홍일까지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이희호는 눈물을 삼키며 남편과 아들의 한복 수의를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전세계적으로 김대중에 대한 구명운동이 벌어졌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까지 나서 서한을 보냈다. 결국 1981년 김대중은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김대중의 투옥생활 동안 이희호는 일기를 쓰듯 김대중에 편지를 보냈다. 1982년 12월 출감 때까지 그가 보낸 편지만 649통에 달했다.
  
이희호가 할 수 있는 일은 헌신적인 옥바라지였다. 쉼없이 독서를 하는 김대중을 위해 각종 책을 사식 넣듯 감옥으로 보냈다. 김대중이 교도소에 수감됐던 2년6개월 동안 이희호가 김대중에 보낸 책만 600권에 달했다.
 
1982년 김대중은 다시는 국내에서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탄원서를 쓰고 2년간 미국 망명길에 오른다. 이희호도 따라나섰다. 하지만 1984년 귀국한 김대중은 결국 다시 정치에 뛰어들게 된다. 12대 총선에서 김대중의 귀국으로 신한민주당이 돌풍을 일으켜 제1야당이 됐다. 이후 김대중은 김영삼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 의장을 맡아 재야 활동을 시작했다.
 
1987년부터 김대중은 연이어 세 차례 대선에 도전한다. 1992년 세 번째 도전에서는 김영삼에게 패배하면서 정계은퇴를 선언하지만 민주당 의원들의 요청으로 3년만에 정치를 재개했다. 이희호는 김대중의 정치 재개를 말렸지만 결국 설득당했다. 김대중은 1997년 3전4기 끝에 대통령에 당선된다. 김대중이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이희호는 1998년 2월부터 2003년 2월까지 영부인으로 청와대 생활을 했다. 이 기간 국민의 정부에서 행정부 최초로 여성부가 설치되는 데 기여를 하기도 했다.
   
2008년 11월 이희호는 자서전 '동행-고난과 영광의 회전무대'를 펴냈다. 제목을 지어준 이는 김대중이었다. 그해 11월11일 열린 출판기념회에서 김대중은 이희호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여 감사인사를 표해 눈길을 끌었다.
 
2009년 노무현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김대중의 병세는 급격히 안 좋아졌다. 김대중 장례는 이희호 뜻대로 국장으로 치러졌다. 국회의사당에 빈소가 차려졌다. 입관 전날 이희호는 김대중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당신에게. 같이 살면서 나의 잘못됨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늘 너그럽게 모든 것 용서하며 아껴주었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의 품안에서 편히 쉬시기를 빕니다. 너무 쓰리고 아픈 고난의 생을 잘도 참고 견딘 당신을 나는 참으로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당신을 뜨거운 사랑의 품안에 편히 쉬시게 하실 것입니다. 어려움을 잘 감내하신 것을 하느님이 인정하시고 승리의 면류관을 씌워주실 줄 믿습니다. 자랑스럽습니다."
    
2009년 8월 23일 국회에서 열린 영결식에서 이희호는 단상에 올라 국민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이희호는 2009년 9월10일부터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에 선임됐다. 이희호는 꾸준히 정치 활동을 지속했다. 2014년 10월에는 청와대를 방문해 박근혜 전 대통령을 만났다. 북한 아동 돕기를 위해 방북을 허가해달라는 요청을 하기 위해서였다. 2015년 8월 이희호는 북한을 3박4일 일정으로 방문하기도 했다.
      
이희호 여사는 지난 3월부터 병세가 악화돼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온 것으로 전해졌다. 가족과 동교동계 등은 이 여사의 병세가 악화될 것을 염려해 지난 4월 장남인 김홍일 전 의원의 별세 소식도 전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음은 이희호 여사의 일대기를 정리한 연보(年譜)다.

▲1922년 9월21일 조선 경기도 경성부 수송정(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 출생
▲1940년 3월 이화여자고등학교 졸업
▲1944년 3월 이화여자 전문학교 여자청년양성소 지도원 양성과 졸업(당초 문과 입학 후 교육비상조치로 전과) 
▲1944~1945년 충남 삽교 공립 국민학교 부설 여자 청년 연성소 지도원
▲1950년 5월 서울대 사범대 교육과 학사 졸업
▲1952년 11월~1953년 여성 문제 연구원 발기 및 간사
▲1954년 9월~1956년 5월 미국 램버스 대학(Lambuth College) 수학(修學)
▲1958년 5월 미국 스카릿 대학(Scarritt College) 사회학 석사학위
▲1958·1963·1965년 이화여자 대학교 사회사업과 강사
▲1959~1962년 대한 YWCA 연합회 총무
▲1961~1970년 한국 여성 단체 협의회 이사
▲1964~1970년 사단 법인 여성 문제 연구회장
▲1964~1982년 대한 YWCA 연합회 상임위원
▲1968~1972년 범 태평양 동남아시아 여성연합회(Pan Pacific South-East Asia Conference) 한국지회 부회장 
▲1993~1998년 더불어 선교회 이사장
▲1994~1997년 아시아 태평양 평화재단 이사
▲1998년 2월25일~2003년 2월24일 제15대 대한민국 대통령 영부인
▲1998~2002년 사단법인 '사랑의 친구들' 명예 총재
▲1999~2002년 국제백신연구소 한국후원회 명예회장
▲1999~2002년 한국 사랑의 집짓기 운동연합회 명예이사장
▲1999~2002년 대한암협회 명예회장
▲1999~2002년 한국방문의 해 추진위원회 명예위원장
▲2000년 6월12일 김대중 전 대통령과 평양 남북정상회담 동행
▲2000~2002년 (재)한국여성재단 명예이사장
▲2001~2002년 세종문화회관후원회 명예총재
▲2001~2002년 재외동포교육진흥재단 명예이사장
▲2002년 유엔 아동특별총회 임시의장 및 기조연설 
▲2003년 사단법인 '사랑의 친구들' 고문
▲2005년~ 외환은행 '나눔의 재단' 이사
▲2007년 8월12~14일 금강산 관광 위해 방북
▲2007~2009년 9월 김대중평화센터 고문
▲2009년 8월18일 김대중 전 대통령 별세
▲2009년 9월10일~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
▲2011년 12월26일 김정은 전 북한 국방위원장 사망 조문 위해 육로로 방북
▲2015년 8월5일 방북
▲2018년 12월26일 건강 문제로 김대중 평화센터 신년 하례식 취소
▲2019년 3월 건강 악화로 서울 신촌세브란스 병원 입원
▲2019년 4월21일 장남 김홍일 전 국회의원 사망
▲2019년 6월10일 오후 11시37분 숙환으로 별세

 

[입력 : 2019-06-11]   김은영 기자 more 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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