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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화

‘문학나눔 보급도서’로 뽑힌 3권의 『문학수첩·시인수첩 시인選』은 어떤 詩集?

‘모자 속의 말(김춘리)’ ‘주름, 펼치는(김재홍)’ ‘무한으로 가는 순간들(안숭범)’...문화예술委, 소설 51종·수필 40종·시 71종 선정

글  백두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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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을 주관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11월 16일 ‘2018년도 도서보급사업’ 심사결과를 발표했다. 문화예술위는 이날 “올해 총 1961종의 도서가 접수됐고 1차 심사를 통과한 512종을 대상으로 2차 심사를 한 결과 최종 258종이 선정됐다"고 발표했다.
    
이번 사업에 신청한 도서의 분야별 선정현황을 살펴보면 소설은 283종 중에서 51종, 수필은 485종에서 40종, 시는 521종에서 71종, 아동·청소년은 612종에서 83종, 평론·희곡은 60종에서 13종이 선정됐다.
             
    
㈜문학수첩이 발행하는 '시인수첩 시인선'. 작년 6월부터 올해 11월 현재까지 18권의 시집이 나왔다. 사진=문학수첩 홈페이지 캡처 
      
     
지난해 ‘시인수첩 시인선’ 시리즈를 발간하며 한국 시단(詩壇)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 있는 ㈜문학수첩은 이번 심사에서 시집 3종·소설 1종이 선정되는 결과를 얻었다. 조앤 롤링의 원작 ‘해리포터 시리즈’를 출간하며 출판계에 인지도를 높인 문학수첩은 2011년부터 시(詩)전문 계간지 ‘시인수첩’을 발행하고 있다. 계간 ‘시인수첩’은 ‘시인들만의 시 문예지가 아닌 시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하는 시 문예지’를 지향하고 있다.
      
㈜문학수첩은 판매부진 등 경영상의 이유로 시집 발간을 기피하는 출판계의 분위기 속에서도 계간 ‘시인수첩’에 이어 작년 6월부터 ‘시인수첩 시인선’을 내고 있다. 2018년 11월 현재 18종의 시집을 출간했다. 2014년 문학수첩 대표이자 한국시인협회장을 지낸 김종철 시인이 타계한 이후 김 시인의 부인인 강봉자 여사가 현재 문학수첩을 이끌고 있다.
   
이번에 선정된 문학수첩의 시집 3종은 김춘리 시인의 ‘모자 속의 말’, 김재홍 시인의 ‘주름, 펼치는’, 안숭범 시인의 ‘무한으로 가는 순간들’이다.
                 
시 분야 도서선정을 담당한 문화예술위 심사위원단은 총평에서 “많은 시집을 한 달 동안 읽은 본심위원들은 한편으로는 황홀하고 즐거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고역스럽기도 한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며 “우선 자본이 전지구화 하고 대중문화산업만이 득세하는 현실 속에서 별로 대접받지 못하는 시집들이 그토록 많이 쏟아져 나온 것에 대해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오로지 소유욕뿐인 거친 자본문명 속에서도 내밀한 존재의 심연과 꿈을 들여다보는 시들, 사람살이의 애환을 버무려 공명의 감동을 끌어내는 시들, 관습적이고 갑각화 한 삶과 세계에 성찰과 인식의 충격을 주는 시들의 성찬을 통해 우리 시대 한국시문학의 한 성과를 짐작할 수 있었다"며 “시집들은 감각과 현실과 미학을 두루 갖춘 것들이었다"고 평했다.
  
    
상투적 언어에 대한 저항, 세계와 자아의 매혹적인 연결 존재의 고독을 치유하는 초월의 언어들...‘문학수첩 시인선’의 108번째 시집 
    
          
김춘리 시인의 ‘모자 속의 말’.
김춘리 시인의 ‘모자 속의 말’은 ‘문학수첩 시인선’의 108번째 시집이다. 강원도 춘천 출생인 김 시인은 2011년 국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2012년 천강문학상에 당선된 후 2013년 첫시집 ‘바람의 겹에 본적을 둔다’를 냈다. 독특한 언어와 상상력으로 익숙한 어휘들 속에 낯선 느낌을 집어넣는다는 평가를 받았던 김춘리 시인은 두 번째 시집 ‘모자 속의 말’에서도 자신만의 개성적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시인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검열하며, 스스로의 현실 조건과 장애를 철저하게 성찰한다. 시인이 구축하고자 하는 세계는 흔히 일탈이라 불리는 탈주와 검열을 통해 언어의 틀을 뛰어넘어, 세상에 대한 합리적 이해의 얼개를 제 안에 감춘다. 존재적 좌절과 불안에 대한 자기검열은 시인을 험난한 궁지로 몰고 가지만 시인은 기꺼이 자기검열 또는 자기성찰을 통해 삶의 형식과 깊이를 얻어 낸다.
      
애쓰는 말은 잡식성 동물
말은 내가 내뱉는데
채찍과 고삐는 타인이 쥐고 있다
 
소의 뿔과 몸집은 어느 쪽이 주인일까
 
애쓰는 말이 주인일까
소 같은 말이 주인일까
 
채찍과 고삐를 휘두르는 건
편두통 때문일까 뿔 때문일까
타이레놀 두 알이면 뿔이 날아갈까
 
뿔을 모자에 감춰 보지만 자꾸 뚫고 나오네
 
모자를 벗을 때 쏟아져 나오는 것은 말
뿔은 말의 주인일까
 
버티는 힘으로 애를 쓴다
 
딸랑딸랑 방울 소리가 난다
 
애쓰는 말이 들린다.
- ‘모자 속의 말’ 전문
    
시인의 언어와 사유는 정형화되어 있지 않은 까닭에 그 실체를 확정하기 힘들 만큼 난해하다. 따라서 이 대결은 매우 힘든 싸움일 수밖에 없다. 어느 쪽이 주인인지 모르는 “소의 뿔과 몸집"의 관계처럼 이러한 대결의 한복판에 서 있는 시인은 단순히 상상의 놀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와 사회를 상대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존재론적 삶에 대한 철학적 고민에서 시작되는 김춘리의 시적 사유는 검열과 탈주, 상상과 사색을 통해 연속체의 감각으로 이어진다. 세계와 자아의 연결은 여행에서 얻는 전설과 신화, 풍경과 어둠의 무한 감각을 통해 가능해진다. 존재론적 삶의 일관성 속에서 유한의 감각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존재론적 고독의 국면도 치유의 매개를 갖게 된다.
  
    
주름을 펼쳐 지구를 감싸는 불가능한 꿈의 시인...‘시인수첩 시인’ 일곱 번째 시집
     
                 
김재홍 시인의 ‘주름, 펼치는’.
김재홍 시인의 ‘주름, 펼치는’은 ‘시인수첩 시인선’의 일곱 번째 시집이다. 1968년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나 울산에서 성장한 김 시인은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문학이론을 전공했다. 2003년 중앙일보에 시 ‘메히아’가 당선돼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메히아’와 ‘다큐멘터리의 눈’이 있다.
    
유머와 기지를 견지한 등단작 ‘메히아’는 “짐짓 아닌 척하면서 허술한 표정으로, 그러나 할 말은 다 하고 있는, 평범을 가장한 시"라는 평을 받았다. 김 시인은 첫 시집 ‘메히아’에서 “자신이 선택한 대상을 정밀하고도 사실적으로 응시하고 기록함으로써 그 대상들로 하여금 구체적인 물질성으로 살아 움직이게끔 하는 힘을 부여"했다.
     
김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다큐멘터리의 눈’은 “범상치 않은 관찰력의 경지를 보여 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일견 시와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의학 지식과 용어가 등장함에도 “시인 스스로 주관적 견해를 최대한 억제하기 때문"에 건조하되 짙은 페이소스를 느끼게 한다. 방송사에 근무하고 있는 생활적 환경과 경험을 미학적으로 형상화하여 시로써 새로운 면목을 선사하고 있음이 크다.
          
이번 '문학나눔 도서보급사업'에 선정된 시집 ‘주름, 펼치는’에는 44편의 시가 수록돼 있다. 이전 시집에 비해 인식의 깊이가 깊고 대상의 이면을 꿰뚫어 보는 시선이 더욱 예리해졌다. ‘움직이는 대상’의 의미를 성찰하고 내면화할 때뿐만 아니라 ‘대상의 움직임’ 자체를 관찰할 때조차 기민하고 날렵한 시적 상상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움직임’의 순간순간을 포착하는 시인의 눈은 시간의 분절, 시간의 주름을 이미지화해 자아의 총체적 무늬로서 ‘주름’의 시학을 완성해 냈다.
         
“고등학교 1학년 봄 난생처음 참가한 백일장에서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모두 낙방한 가운데 홀로 받은 입선(入選)상으로부터 거의 20년 동안 나는 이른바 등단을 위해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생활을 했다"는 김 시인은 한동안 찾아가지 않고 기다려 받아 적는 것으로 시작(詩作) 활동을 해왔다. 이 점 덕분에 일찍부터 “정밀하고 사실적인 묘사"로 평론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종섶 시인은 이를 두고 ‘다큐적 보도방식’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시인은 공이 “투수의 손을 떠나는 순간"(「자유 혹은 발산하는」), ‘파도가 암벽이 되는 어느 순간’(「암벽, 헤엄치는」), 오토바이 충돌 사고의 순간(「빨간 점퍼를 입은 블랙아웃」), “밤을 가르는 순간의 파열음이 솟구치는 순간"(「소리의 순간」)을 본다. 그리고 “무수한 너의 순간"과 “정신의 순간"과 “영혼의 순간"(「순간을 위하여」)을 생각한다.
         
시간과 속도 속의 주름, 새로운 황홀경
    
김재홍 시인은 “어제와 그제와 내일과 모레 사이에서" “어둠에서 심연에서" “순간과 순간을 잇는 순간"을 본다. 그러면서 “순간은 언제나 우발적이고 영원 또한 우발적이다"(「순간, 우발적인)라고 말한다. 「흐르는 것」에서는 “흐르는 것"의 속도가 순간을 지우고 시간을 지운다고 표현한다. 속도는 인간성을 외면하고 서정성을 무시하는 부정적인 대상이 되기도 하고 움직이는 것을 죽음으로 몰기도 하며 정지된 것에 역동성을 부여하는 시적 상상력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하지만 시인의 상상력 속에서 속도는 움직이는 대상에게 굴하지 않는 자유의지를 부여한다.
       
투수의 손을 떠나는 순간 공의 물리적 초기 값
이탈 시점의 근육 운동의 크기와 속도와 높이 각도
수치화할 수 있는 매개 변수를 추출해
방정식에 입력하면 그 공의 미래는 예측된다
좌표상의 아주 깔끔한 시각화도 가능하다
공의 궤적을 그리는 것은 언제나 수학적이다
그러나 공은 완봉승을 꿈꾸는 투철한 욕망 덩어리가 아니라
타자의 방망이를 부러뜨리거나 회피하겠다는 불굴의 의지가 아니라
임의의 수치로 표백된 추상이거나 기호거나 상징이거나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공포에 떨며 끊임없이 흔들리는
스스로 매개 변수를 대체하며 시시각각 맞바람을 느끼는
자신의 불확실한 자유에 체념하고 운명을 인정하는
외부적 관성이 아니라 자발적 운동을
기계적 분절이 아니라 연속적 자극을
계수적 희망이 아니라 우발적 사건을
순간과 순간의 격렬한 욕망을 향해
어금니를 깨물고 날아간 순연한 운명
자유 혹은 발산하는
 -「자유 혹은 발산하는」
    
주름을 펼쳐 지구를 감싼다
지구 위 가득한 주름을 덮고
지구 속 한없는 주름을 덮고
나를 펼쳐 끝없는 나를 끌어안는다
주름 아래 그늘진 주름 아래 다시
주름을 펴는 힘으로 주름을 덮는
나를 펼치는 힘으로 나를 덮는
꿈을 꾼다
꿈을 믿기 위하여 꿈을 꾸지
꿈을 믿지 않기 위하여 꿈을 꾸지
나를 부정하기 위하여
나를 인정하지
주름이 주름 앞에서 솔직해질 때
주름이 주름을 만나 진실해질 때
참다운 구원은 천상에 있고
참다운 운명은 여기에 있다고
고백하는 나의 주름을 모두 펼쳐
주름 이전의 주름을 덮고
주름 다음의 주름을 덮고
주름 속의 주름 속의 주름을 끌어안는다
 -「주름, 펼치는」 전문
 
  
주름진 세계의 내력을 위하여, 그리고 주름의 주름을 위하여
   
‘주름, 펼치는’이라는 제목에서도 쉽게 알 수 있듯이, 시인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일종의 흔적인 들뢰즈의 ‘주름’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를 날것으로 내뱉지 않고 사유의 행간에 잘 녹여 놓고 있다. 그런데 해설자 역시 들뢰즈의 사유와 김재홍의 시를 전면적으로 내세우지 않는다. 독자와 시 사이의 행간의 사유, 다양한 것들의 마주침을 배려한 것 같다.
       
시집 초반에서 ‘속도’와 ‘순간’에 집중했다면,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시인 특유의 개성을 녹여 내며 파란만장한 다큐멘터리처럼 야구와 서번트 증후군과 사건과 죽음과 사회와 지구촌 뉴스 사이를 종횡무진한다. 마치 순간 포착 카메라로 세상을 뒤지고 다닌 듯 우리가 어디선가 보고 듣고 겪은 듯한, 겪고 있는 듯한 세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시인에게 야구가 시고 다큐멘터리가 시듯이, 시인에게 삶은 다큐멘터리며 시다.
      
“시는 어렵다는 고정관념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스포츠 이외에도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이 다 시가 될 수 있다"는 시인의 말대로, 시인은 대상과 사물을 따뜻한 감성으로 바라보면서도 감정을 드러내고 비유하는 대신 사실을 전달하려 애쓴다.
   
“나는 진실했는가/내가 보고 들은 것/내가 겪은 것에 나는/나를 바쳤는가"라는 네 줄짜리 「시인의 말」처럼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시를 쓰고 세상을 쓴다. 자신의 전 존재를 낱낱이 해체하고, ‘나를 부정하기 위해 나를 인정’하며 “고백하는 나의 주름을 모두 펼쳐 / 주름 이전의 주름을 덮고 / 주름 다음의 주름을 덮고 / 주름 속의 주름 속의 주름을 끌어안는다".
 
김 시인의 시집 말미에 들어 있는 ‘작품해설’은 문학평론가인 류신 중앙대 교수가 썼다. 류신 교수는 ‘속도의 시학, 주름의 미학’이라는 제목의 해설에서 “시인은 주름을 속도가 인간의 삶에 남긴 금으로 인식한다"며 “그에게 주름은 생의 순간과 순간이 만든 시간의 골에 다름 아니다"고 평했다.
       
요컨대 김 시인의 주름은 한 실존이 통과한 세월의 지층인 동시에 그가 앞으로 관통해야 할 미래다. 류신 교수는 “비유하자면 ‘내일이 겹겹이 쟁여지는 순간들(「소리의 순간」)’이 누적된 장소"라며 “그러므로 주름은 자아의 총체적 무늬"라고 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순간들을 투사하는 영사기...‘시인수첩 시인選’ 아홉 번째 시집
  
 
안숭범 시인의 '무한으로 가는 순간들'.
안숭범 시인의 '무한으로 가는 순간들'은 ‘시인수첩 시인선’의 아홉 번째 시집이다. 안 시인은 1979년 광주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5년 ‘문학수첩’ 시 부문 신인상을 통해 시단에 발을 들여놨고 2009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신인 평론 최우수상을 받으며 영화평론가로도 등단했다. 2010년 대산창작기금을 수혜했으며, 시집으로 ‘티티카카의 석양’이 있다. EBS ‘시네마천국’을 진행한 바 있으며 현재 한신대학교 인문콘텐츠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안숭범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무한으로 가는 순간들’은 마치 영화를 상영하듯 소멸된 시간을 되살려 재생하고 있다. 시인은 영화감독이 구도 안에 소품들을 배치하듯 기화(氣化)된 시간들, 흐릿해져 더 이상 만져지지 않는 기억들을 감각적 요소로 전환해 미장센의 질서 안에 배열한다. 그 미장센은 이미지들을 의도적으로 분할하거나 거기에 과도한 수사를 입히는 대신, 롱테이크로 펼쳐 놓는다. 시인은 지극히 섬세한 묘사로 이미지들을 나열하고 호명하면서, ‘꿈’ 같은 지난 생의 구체적인 장면들을 재생한다.
  
롱테이크로 담은 구체적이고 섬세한 기억의 묘사
 
기억은 불완전하고 선택적이며 현재를 구성하는 데 유리한 방식으로만 호명되기 마련이지만 안숭범 시인의 기억은 보존 상태가 무척 양호해 장면의 온전함과 상황의 객관성, 감정의 주관성을 모두 유지한다. 기억에 대한 시인 특유의 유난한 강박과 집착은 이 두 번째 시집에서도 잘 드러난다.
    
첫 번째 시집 ‘티티카카의 석양’에 대해 문학평론가 유성호가 했던 말처럼,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도 “사라진 것들, 오지 않을 이름들, 어쩌면 미리 추억했어야 했을지도 모를 사연들을 일일이 호명하고 각인한다". 특히 시인이 자신의 작품에서 주로 활용하는 영화 기법 ‘롱테이크’ 방식의 이미지 전개 역시 이런 구체적이고 섬세한 기억의 묘사 덕분에 가능하다.
      
롱테이크는 말 그대로 긴 쇼트를 편집 없이 계속 찍어서 장면을 구성하는 기법으로, 사실성을 극대화해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 속 장면과 동화되게끔 한다. 시집의 해설을 맡은 이병철 시인은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나서 마치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듯, 안숭범의 시를 읽는 일 또한 그러하다"고 말한다. 시와 영화는 매체와 표현 양식에서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지만 본질적으로 이미지 구성의 방식과 재맥락화라는 점에서 많은 부분을 공유한다.
   
시 「동숭동, 혹은 무한으로 가는 순간들」에서 안숭범 시인은 기억 속 ‘동숭동’을 구성하는 형상과 질료를 일일이 호명하면서 이미지들을 마치 영화 속 롱테이크처럼 펼쳐 놓는다. 이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시간들을 향해 가는 “후진하는 언어"이기도 하다. 이병철이 안숭범을 ‘기억의 고고학자’라 명명한 것은 이런 이유일 것이다.
     
존재의 환희와 소멸을 포착하는 롱쇼트의 미학
  
안숭범이 기억 속 풍경을 이미지로 묘사하는 화법은, 영화 촬영 기법 중 원거리에서 인물과 배경을 함께 담는 ‘롱쇼트’를 떠올리게 한다. 어떤 대상을 시적 이미지로 형상화할 때 시인은 “그 대상만 가져오는 게 아니라 그 주변까지 함께 ‘떠’ 온다"(이병철). 즉 대상뿐만 아니라 그 주변, 대상이 속해 있는 시간과 공간, 관계 맺은 다른 대상들까지 시로 옮김으로써 생동감을 불어넣고, 그러한 거리 유지를 통해 시적 긴장감을 고조한다.
      
시적 대상의 주변마저 이미지화하는 시인의 시선은 그 대상을 향한 애정과 죄의식을 담고 있다. 이는 환희와 소멸이 교차하는 실존의 낙차를 포착하고자 하는 시인의 미학과 관계가 깊다. 안숭범에게 시 쓰기는 타자의 소멸 앞에 무기력한 스스로를 책망하고 또 위무하는 소멸의 수용이기도 하다.
     
시 「양심의 고고학」에서 시인은 ‘죽음’을 ‘죽임’이라고 고쳐 부르면서 자신과 관계 맺은 모든 타자의 소멸에 죄의식을 드리운다. 용천목에 물을 너무 많이 줘서, 피망에 물을 너무 주지 않아서 죽음에 이르게 한 자신의 과오를 후회하고, “빈 화분 안으로 가는 시선을 도무지 구해 낼 수 없"었던, 타자의 소멸이 진행되는 동안 그것을 중단시킬 어떠한 행동도 하지 못한 무력함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소멸에 대한 연민과 죄의식은 안숭범의 시를 “후진하는 언어"로 끌고 가는 동력이다. “세기말 훨씬 이전부터 이미 이 세상은 원본 없는 표상의 공간임을, 신과 인간, 희망과 구원이 모두 한 줌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 버린"(이병철) 시인은 대상 및 그 주변을 향한 애정과 죄의식의 고백을 통해, 그리고 지난 시간에 대한 섬세한 묘사를 통해, 즉 ‘시’의 힘을 통해 “한 줌 먼지들을 먼지가 아니었던 시절"(「무교동」)로 부활시키고자 한다.
    
안숭범에게 시는 온갖 절망과 비애, 소멸의 양상을 기어이 돌파해 내는 신앙이 된 듯 하다. 그가 겪은 세기말처럼, 오늘날 세계는 여전히 불완전한 표상들로 가득 차 있지만 안숭범은 그것들이 “먼지가 아니었던 시절을 사랑하"려 한다. 원본을 잃어버려 허상이 되어 버린 모든 기억들을 먼지 이전의 상태, 즉 형상과 질량, 체온과 숨결을 지닌 구체적 ‘너’로 되살려 내기 위해 그는 시라는 신앙으로 매일 귀의하는 중이다. 이제는 구식이 되어 버린 신실한 믿음을 향해 매일 후진하는 중이다. 그 “신앙에 매달린 기적"이 마침내 영원을 업은 순간, 지난날의 모든 추억과 몽상, 낭만들이 무한으로 함께 간다.
 
 

 

[입력 : 2018-11-18]   백두원 기자 more 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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