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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것에 대하여

“현재주의자는 생성되는 의미의 수신자이지 발신자가 아니다”

글  김재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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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시인은 보이는 것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며,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것을 표현한다. 시사(詩史)는 오래도록 시인에게 심안(心眼)을 바랐으며, 참다운 시인이라면 언제나 보이지 않는 것을 살피고 찾아 그 깊은 속살을 드러내 왔다. 그런 점에서 심안은 살피는 눈(審眼)이자 깊은 눈(深眼)이다.

  

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능력을 최상의 덕목으로 삼아 왔다. 그러므로 이것은 유물론이 아니다. 의미와 의미 사이 혹은 표면의 의미, 의미의 표면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표면이다. 이것은 유물론이 오랫동안 가로막고 있던 물질과 의식의 층위 그 ‘사이’다. 이것은 관념론도 아니다. 보이는 것을 전적으로 배제한 허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질계를 전적으로 부정하거나 본질의 일개 복사물로 치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싶다.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 때문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 진실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세계를 탐험하는 자연주의자의 물리(physics)로써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만지고 느끼고 싶다.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을 압도하는 양과 질을 가지며,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을 포함하고 규정한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싶은 욕망은 자연주의자의 탐구정신에 가깝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은 상상이거나 망상이 아니다. 오히려 보이는 사실 속에서 보이지 않는 의미를 읽는 것이다. 물질과 의식의 대립이 아니라 ‘사이’다. 표면과 표면 사이, 접면과 접면 사이다. 의미는 물질과 의식의 접촉면 위에서 형성되는 시간 운동이다. 시인은 그런 ‘사이’의 운동을 읽는 사람,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심안은 탐구자의 눈이자 현재주의자의 눈이다.

  

진정한 현재주의는 오늘의 눈으로 과거를 농단하는 게 아니다. 칼을 들어 과거를 난자하고, 총을 들어 과거를 난사하는 게 아니다. 미래주의에 미래가 없는 것과 동일한 이유로 현재주의에는 오직 현재가 있을 뿐이다. 오늘의 눈으로 오늘을 보는 것, 그것이 현재주의다. 현재주의자는 우발적으로 생성되는 표면 혹은 사이의 시간 운동을 충실히 기록하는 사람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현재주의자는 의미의 수신자이지 발신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현재주의는 결코 현재의 오만이 아니다.

  

그렇다면 시인은 허상이 아니라 실상을 보는 사람이며,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도 실상이 된다. 시인이 기록하는 현재는 심안에 펼쳐지는 무한한 의미의 실상들, 실상으로서의 의미들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주의 시인은 진정한 관념론자이며, 동시에 유물론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란다’면 그것은 세계를 ‘보기’ 때문이다. 시인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현재주의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세계를 똑똑히 바라보며 즐거워하며 고통스러워한다. 우리는 세계 안에서 세계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모두 보는 존재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바란다.’. 우리의 결핍은 존재론적인 것이므로 ‘바람’ 또한 존재론적이다. 때문에 참다운 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바라는 사람’이다.

  

  

     머리 위로는 여러 개의 하늘이 모여 손을 잡는다.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보이지 않는 나라의 숨, 들리지 않는 목소리의 말,
     먼 곳 어렵게 헤치고 온 아늑한 시간 속을 가면서.
     - 마종기(1939- ),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중에서

  

  

사도 바오로는,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니"며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린다."고 역설했다.(로마서 8, 24-25) 세계를 이룩하고 있는 물질과 의식과 의미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분절된다면, 우리는 시인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것’에서 ‘바라는 것’을 언어화한 보고서를 수신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언제나 ‘바라며’, 시인은 그 바람을 표현하는 사람이다. 세계는 결핍이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는 만큼 세계는 결핍이다. 그래서 모든 시론은 ‘바람의 시론’일지 모른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바라는 시인’은 냉혹한 현재주의로써 바람을 전하는 참다운 구원의 사도일지 모른다.

  

  

  

[입력 : 2019-06-19]   김재홍 기자 more 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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