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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럼
  2. 김재홍의 길을 찾는 여행

울분을 삭이는 힘으로…

“자유를 지켜내고, 그 자유의 힘으로 당당하게 미래를 열어가는”

글  김재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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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만나러 가는 길은 멀지 않았다. 어렵지도 않았고 힘들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너무 오래 걸렸다. 성급한 마음을 다독이며 내려가는 길은 한 시간도 길게 느껴졌다. 물리적 거리를 넘어서는 조급증은 반나절이 채 안 되는 이동을 너무 길게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그의 따뜻한 성품에서 받은 위안과 그의 지혜와 경륜에서 얻는 용기를 생각한다면 덕유산 자락을 찾는 걸음은 너무 늦었다.

  

그는 사유와 사색에 바탕을 둔 교양인이자 방송 현장의 경험을 보편적 지식 체계로 정립할 줄 아는 프로듀서였다. 또한 동서양 문학사의 우뚝한 작품들을 그 위엄에 맞게 평가할 줄 아는 문인이며, 그것을 직접 양장으로 제본하여 귀한 것을 귀하게 다루는 사람들과 나눌 줄 아는 컬렉터이다. 장수(長水)에 살면서도 워싱턴과 런던과 파리에 살고, 경제를 보면서도 남북문제와 북미문제와 동아시아의 정치외교 지형도를 읽는 사람이다.

  

무엇보다 그는 사람을 귀하게 대하는 사람이며, 누구를 보아도 그 사람의 장점과 에너지를 찾아내는 사람이다. 자신의 지식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형편에 맞게 전하고, 상대의 성근 주장도 자신의 체계 속에 정립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주변에는 늘 속 깊은 사람들이 자신의 높낮이를 염려하지 않고 모인다. 때문에 반년을 넘겨 그를 만나러 가는 나의 길은 너무 멀고멀었던 것이다.

  

그는 양봉업자들이나 쓸 걸로 보이는 그물이 달린 방충 모자 같은 것을 쓰고 있었다. 악수를 한 손바닥은 흙과 풀물로 노랗게 변색돼 있었다. 그는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잡초를 뽑고 있었노라고 했다. 그러면서 하얗게 웃으며 나를 맞았다. 시골에서의 시간은 물리량이 아니라 노동량일 것이라며 잠깐 정신없이 무슨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다저녁이 되어 버린다고 했다. 어쩌면 그러한 시간이 자연의 시간이며 그러한 삶이 진짜 자연의 삶인지 모른다.

  

모내기를 막 시작한 들녘을 배경으로 그와 함께 덕유산 자락을 향해 걸었다. 봄기운을 한껏 머금은 터앝의 남새들과 마을길 따라 연이은 호두나무 잎새는 눈부시게 푸르렀다. 돌담 아래 양귀비꽃은 그 짙붉은 색감으로 1300여 년 전에 떠난 귀비(貴妃)의 거부할 수 없는 고혹을 연상케 했고, 어린아이 손톱만한 꽃잔디 여린 꽃들은 한 다발을 이뤄 풍성한 꽃바구니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선명하고 탐스러운 마을길 따라 덕유산으로 향하는 걸음은 그다지 가볍지 않았다. 자유민이 된 후배의 자유에 따르는 불안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염려 때문이 아니었다. 또 시골에서의 은일한 삶과 경륜을 펼칠 때를 만나지 못한 선배의 불운 때문이 아니었다. 후배는 자유로써 불확실한 미래와 싸우면 될 일이고, 선배는 언제든 때를 만나 세상으로 나오면 될 일이다. 우리의 걸음을 무겁게 한 것은 오히려 너무나 확실하게 드러난 현상 때문이었다.

  

적자를 거듭하는 속에서도 이념적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하는 방송이 문제였다. 경계를 넘어 버린 폭주 기관차와 같이 노조는 방송계 전반의 이념화를 촉진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상당수 전직 노조위원장들이 경영진에 진출함으로써 일종의 카르텔이 형성됐다고 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신원주의(身元主義)를 거부한다면 노조와 노조위원장인 이유로 방송 경영인이 되는 것을 부정할 이유도 없고 막을 수도 없다. 국민 모두에게 유익한 보편적 지평 위에서 방송을 하면 되는 일이다. 이념적 프레임을 고집하는 계몽주의적 악화가 아니라 세계의 변화에 유기적으로 대응하는 진짜 리얼리스트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데 우리는 한탄했다.

  

또 명백한 경제지표마저 믿지 않으려 하는 정부와 냉혹한 국제정치적 질서를 벗어난 감성적 통일론이 여전한 데 우리는 우울했다. 국민이 느끼는 체감경기가 혹독할 정도로 얼어붙었는데도 국가경제의 펀더멘탈(Fundamental)은 튼튼하다고 운운하는 경제 관료들을 믿을 수 없다. 남북문제는 결국 국제 사회의 복잡한 역학관계 속에 정립되어야 하는 것이며, 아무리 좁혀도 동북아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4대 강국과의 맥락 속에서 통일을 논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애써 부정하는 듯한 정부의 균형감각에 절망했다.

  

덕유산은 해발 1,614미터에 이르는 향적봉(香積峰)을 품은 한반도 남중부의 큰 산이다. 또 무주군, 장수군, 거창군, 함양군 등 4개 군을 아우르는 넓은 산이다. 높고 넓은 어버이 품 같은 덕유산 자락으로 걸어가는 얕은 오르막길은 결코 험하다고 할 수 없었으나 이런 애기들로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그나마 위안이 있었다면 현상에 대한 서로의 의견이 상당 부분 일치되었던 점이다. 비록 흉중의 생각을 다 펼쳐 놓지는 않았지만, 때를 만나지 못한 그가 보는 현실과 자유 속의 불안에 떨고 있는 내가 본 현실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침 모내기를 앞두고 물을 댄 다랑이 논으로 해거름의 붉은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다. 물결에 반사되는 하늘도 맑았고 물도 맑았다. 선배의 지혜를 통해 위안을 넘어 길을 찾고, 선배의 경륜을 통해 울분을 넘어 평심을 찾고자 한 나의 남행(南行)은 퍽이나 성공적이었다. 어쩌면 그도 울분을 삭이는 힘으로 자유를 지켜내고, 그 자유의 힘으로 당당하게 미래를 열어가는 후배를 보고 싶어 했는지 모른다. 언제나 한결같은 자세로 산마을을 굽어보는 덕유산과 같이 그에게도 때가 와 높고 넓은 시선이 현실을 주유하는 순간을 염원한다.

  

  

  

[입력 : 2019-05-10]   김재홍 기자 more 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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