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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길항(拮抗)이다

“불일치와 편차야말로 인간적 진실일지 모른다”

글  김재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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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 윤동주(1917-1945), 「서시」 중에서

  

이렇게 맑고 깨끗한 마음을 꿈꾸었다. 이런 개결하고 순정한 마음이 시적인 것이라고 믿었다. 1984년부터 윤동주 시인의 ‘서시’는 내 인생의 ‘序詩’였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겠다는 청년 윤동주의 다짐은 40여 년이 지나 또 다른 한 청년의 다짐이 되었다. 그렇게 고등학교 1학년 문예반 학생에게 윤동주와 「서시」는 강력한 자극이자 준엄한 기준이었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살아왔는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나의 부끄럼을 괴로워했는가.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 왔는가. 아무리 자기기만(Self Deception)을 해도 자신이 없다. 외려 시란 얼마간은 잡초 밭에 핀 꽃이며 진흙탕에서 자라는 연꽃이라는 시류(時流)에 멋스러움을 느끼지 않았는가. 오히려 인간의 참다운 현실을 알지 못하고서야 시란 허상이라며 일탈과 방종을 조장하지는 않았는가. 그것마저도 날카롭고 진지한 인간 탐구이기는커녕 흉내와 겉멋은 아니었는가.

  

정말 그런지 모른다. 시인 윤동주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은 윤동주의 그 맑음을 사랑하는 것인지 모른다. 속세간의 자신과 대비되는 순수 원형으로서의 윤동주를 말이다. 또한 때 묻고 낡아가는 자신과 대비되는 영원한 청년으로서의 윤동주를 말이다. 그에 대한 작가론적 정보와 작품론적 분석이 아니라 그로 인해 얻게 되는 위안을 말이다. 그런 점에서 후배 시인으로서 윤동주의 「서시」를 ‘강력한 자극이자 준엄한 기준’이라며 선망한 것도 어쩌면 또 다른 자기기만인지 모른다.

  

다시 한 번 생각한다. 나는 나의 부끄럼을 진정 괴로워했는가. 모든 죽어가는 것을 진정 사랑했는가. 시간이 갈수록 자꾸만 원점을 뒤돌아보게 된다. 고등학교 1학년 출발점으로 돌아가 그 무렵의 순수한 고민을 흔들림 없이 계속 발전시켜 왔는가를 따져 보게 된다. 그러면서 선배 문인들의 기록과 흔적에서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영인문학관’(寧仁文學館)을 찾았다. 소설가 김동리와 오영수, 시인 서정주와 박목월과 박두진 등 기라성 같은 문인들의 ‘시서화’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시ㆍ서ㆍ화 다시 보기’ 전은 이들 작고한 문인들만 아니라 김남조, 신경림, 정현종, 이근배, 김지하, 강은교, 황지우 등 70여 명의 시인과 소설가의 작품을 전시한 대규모 행사였다. 때로는 크게 때로는 작게, 붓으로 펜으로 기록한 문인들의 시서화는 그 양과 질에서 한국 현대문학의 격조 있는 문풍(文風)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아포리즘(aphorism)에 가까운 명구로 한껏 멋을 낸 문인이 없지 않았으나, 대부분 자신의 작품을 육필로 남겼거나 사표로 삼고 있는 옛 문인들의 작품을 정좌하여 쓴 서예 작품이 주를 이루었다.

  

“春風大雅能容物 / 秋水文章不染塵"(봄바람처럼 큰 아량은 만물을 용납하고, 가을 물같이 맑은 문장은 티끌에 물들지 않는다.)이라고 쓴 소설가 김동리(1913-1995)의 서예 작품은 그 규모와 담긴 뜻에서 단연 주목되었다. ‘큰 아량’을 다짐하고 ‘맑은 문장’을 선망한 동리 선생의 의욕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의 진의가 그렇다면 그것은 윤동주 시인의 ‘다짐’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또한 200여 년 전 같은 글귀를 대련(對聯)으로 쓴 완당 김정희(1786-1856)의 품은 뜻과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또한 많은 시인들이 다짐하는 바이기도 하다.

  

다시 한 번 자문한다. 나는 ‘큰 아량’을 다짐하고 ‘맑은 문장’을 선망했는가. 또한 나의 부끄럼을 괴로워하고 죽어가는 모든 것을 진정 사랑했는가. 아무래도 자신이 없다. 매일같이 다짐하면서도 ‘큰 아량’에는 도달할 수 없고, 날마다 ‘맑은 문장’을 갈구하면서도 거기엔 이르지 못하고 산다. 부끄럼을 괴로워하면서도 자꾸만 부끄러운 짓을 해대며, 죽어가는 것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분노와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언제나 길항(拮抗)이다. 내가 처한 곳과 내가 이르고자 하는 곳은 언제나 일치되지 않는다. 내 영혼이 지향하는 곳과 내가 실재하는 위치는 언제나 다르다. 어쩌면 이런 불일치와 편차야말로 인간적 진실일지 모른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를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인간 존재의 한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어딘가를 향하는 존재, 도달하지 못한 데서 오는 상실과 좌절의 비애감을 견디며 날마다 어딘가를 찾아나서는 존재이다.

  

그래서 나는 행복하다. 내게는 여전히 윤동주라는 ‘강력한 자극이자 준엄한 기준’이 있고, 나는 여전히 ‘큰 아량’을 다짐하고 ‘맑은 문장’을 선망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입력 : 2019-04-29]   김재홍 기자 more 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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