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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을 지나며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사이에 살아있음이 있다”

글  김재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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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광화문은 상징만이 아니다. 조선왕조의 법궁(法宮) 경복궁의 정문으로서 몰락한 왕조의 서글픈 상징만이 아니라,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의 목격자로서만이 아니라, 시민들의 일상 속에 녹아든 구체적인 물질성으로 살아 있는 문이다. 광화문은 우선 경복궁을 관람하는 내외국 관광객들의 출입문이며, 인근 직장인들의 휴식 공간이며, 젊은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이며, 한 무명 시인의 질문을 받아 준 문이다.

  

예버덩에서 한 달 동안 ‘불안한 자유’를 만끽한 나는 어제 저녁 가까운 후배와의 조촐한 만찬을 뒤로 하고 광화문을 향해 갔다. 걸어 지나는 세종로의 풍경은 변한 듯 변하지 않았다. 한겨울에서 새봄으로 변해 가는 자연과 질주하는 차량의 변치 않는 풍경은 미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세월호 사고로 목숨을 잃은 어린 학생들과 희생자들을 기리며 사고원인 규명과 안전하게 살 권리를 주장했던 천막은 철거되었고, 광화문에서 숭례문으로 또 종로에서 서대문으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끊임없이 걸어가는 사람들의 행렬은 서로 뒤섞여 꿈틀대며 이어져 있었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사이에 살아 있음이 있다고 할까. 나의 바뀐 생활 리듬과 항상성을 지켜내고 있는 옹졸함 사이에 ‘나의 살아 있음’이 있다고 할까. 엊저녁 광화문을 바라보던 나의 마음은 어딘가 고고한 높이를 찾는 일종의 일탈 심리였다면, 같은 시각 광화문에서 세종로를 바라보던 마음은 나와 나를 둘러싼 변치 않는 일상의 무게였다. 언제나 변치 않는 탈출에의 욕망과 시시각각 변하는 일상의 다양한 변주 속에 내가 있다.
  
그러나 그런 일상 속에서도 나는 언제나 사사건건 옹졸하고 시시콜콜 메말라 있다. 무시로 아내와 다투고 아이들을 혼내고 무엇보다 부실한 나를 타박하며 살아간다. 또 변치 않는 탈출 욕망에도 불구하고 탈출해서 이르고자 하는 곳은 수시로 변한다. 어느 곳이 탈출지가 될 수 있을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불특정의 무엇이 내게 열려 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비평가 유종호 선생이 말한 전형적으로 ‘비주체적인’ 인격이다.
  
광화문을 지나며 나는 김수영을 떠올렸다. 그는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왕궁의 음탕에 분노하지 못하는 대신 갈비집 주인에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한 ‘옹졸한’ 자신을 가차 없이 질책한 바 있다.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라며 권력에 저항하지 못하고,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는 자신의 ‘유구한’ 옹졸함을 낱낱이 비판했다. 그는 아무도 고발하지 않는 자신의 숨겨진 모든 옹졸함을 만천하에 공개함으로써 드러나지 않는 진짜 숨은 죄악들에 유죄 선고를 내렸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난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 김수영(1921-1968),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중에서
  
김수영의 배짱 좋은 판결과는 달리 나는 여전히 옹졸하고 메말라 있으며 비주체적이다. 이러한 나의 변치 않음과 일상의 무한한 변화 가능성 사이에 참다운 나는 어디쯤 있을까.
  
  
  

 

[입력 : 2019-04-03]   김재홍 기자 more 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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