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1. 칼럼
  2. 김병호의문학읽기(종료)

詩와 풍경의 거리

"당신이 기다리고 있는 봄 항구에 꽃이 피고...방 안 가득 넘실대는 초록은 벌써 내 키만큼 자랐다"

권대웅 「북항(北港)」 VS 박소란 「누가 자꾸」

글  김병호 협성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네이버 블로그
  • sns 공유
    • 메일보내기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미적 주체로서 시인은, 인간 존재의 심연을 투영하고, 내면의 격렬한 고뇌를 반영하며, 세계의 불가해한 본질을 투사하고자 하였다. 막연한 감동이나 상실감을 통해 도달하는 삶에 대한 낭만적 환상이나 욕망의 매개로서 자연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어떤 생산적 의미나 항체를 방출하는 공간으로 재창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요즘 김춘수 선생의 글을 다시 읽고 있는데, 언젠가 밑줄 그으면 읽은 대목이 다시금 눈에 들어왔다.
  
“돌은 무뚝뚝하고 표정이 굳어 있다. 얼른 보아 그런 인상을 준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돌에도 표정이 있다. 돌의 표정은 더욱 미묘하고 신비스럽다. 그것은 밤의 표정, 어둠의 표정과도 같다."
    
「돌의 표정」이라 짧은 글에서 그은 밑줄이었다. 시인은 석류꽃이나 화강석 벽의 네모반듯한 돌들도 모두 제 각각의 개성과 제 각각의 감정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들은 스스로 추상화나 개념화를 거부한다고 말한다. 사물의 뉘앙스와 표정을 읽어내는 일은, 사물의 몸과 마음의 비밀을 엿보는 것이며 오로지 시인의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는 의미로 읽혔다. 더불어 꽃이나 돌에 비치는 밤의 표정과 어둠이 빚는 뉘앙스는 결국 어둠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이라는 시인의 주장에도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지적 주체로서의 詩人
     
사람들은 자연 풍경을 대상으로 하는 시들을 흔히 현실인식이 부족하다고 거칠게 폄하하곤 한다. 이러한 오해와 편견은 시를 포함한 문학 속에서 자연이 현실 은폐와 이를 강화시키는 기제로 이용됐기 때문이다. 1990년대 이데올로기의 알레르기로 신서정이 등장한 이후, 시에서 그려지는 자연은 이전과 다른 차원에서 다양하게 의미화되었다.
  
이를테면 정치 사회와 절연된 유토피아의 공간이나, 편집증적 애착이 노골화된 미학적 대상의 공간으로 현실적 결핍과 괴리감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때 자연에 대한 예찬이 내용 없는 아름다움에 대한 투신이라는 조롱과 더불어 미학적 사치라는 굴레에 갇혀 움쩍달싹하지도 못했다.
   
자연에 대한 열망과 시화 자체가 새로운 미학이 되진 않는다는 사실에 대부분의 시인들은 동의한다. 이는 사회나 역사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싶은 ‘개인’으로서의 욕망이 자연에 투사되긴 하지만 삶의 태도와 가치관까지 규정하진 못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시화 과정에서 드러나는 미학의 단순성과 획일성은 시를 지탱하는 철학적 빈곤과도 직결된다.
   
문학을 구성하는 실재의 하나가 세계와 삶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이라고 할 때, 작품의 의미와 완성도는 문제의식의 철학적 깊이에 의해 결정된다고 받아들여지기 마련이다. 미학의 단순성과 맞물려 인식되는 이러한 태도의 근간에는, 현실 인식이 누락된 소박한 미학이 우리 사회의 삶을 대변하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또 다른 오해와 편견이 누적되어 있다.
        
그러나 2000년대 미래파 소동 이후 시인들은, 자연에 대한 깊은 친화력과 섬세한 언어 세공술, 심미적 감식안을 특장으로 자연 풍경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자연 속에서 미적 황홀을 체험하거나 존재적 충만감에 몰입하는 풍경에서 벗어나, 미학의 협소함이나 획일성에서도 벗어나는 모습들을 보여주려 노력하였다.
  
미적 주체로서 시인은, 인간 존재의 심연을 투영하고, 내면의 격렬한 고뇌를 반영하며, 세계의 불가해한 본질을 투사하고자 하였다. 막연한 감동이나 상실감을 통해 도달하는 삶에 대한 낭만적 환상이나 욕망의 매개로서 자연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어떤 생산적 의미나 항체를 방출하는 공간으로 재창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목련이 핀다
꽃 속에서 뱃고동 소리가 들린다
정박해 있던 배가 하늘로 떠난다
깊고 깊은 저 먼
꽃의 바다
눈이 내리고 눈이 쌓여
오도가도 못 하는 마을에
백발(白髮)의 노모가 혼자 저녁을 짓는다
들창 너머 목련나무로 배가 들어온다
겨우내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했던
말이 터진다.
나무에 수없이 내리는 닻
저 구름 너머에서 들어오는 배와
통음(通音)하던 하얀 눈송이들이
펑펑 운다
떠나는 곳이 있고 돌아오는 것이 있지만
이 세상에 항구는 단 하나다
당신이 기다리고 있는,
봄 항구에 꽃이 핀다
- 권대웅 「북항(北港)」 전문
  
 
시인이 이끄는 대로 그의 미적 시선을 좇아가면 자연스럽게 섬세한 미감에 공감하게 된다. 그리고 시인이 자연을 시화한 동기나 목적이 경험의 육화보다 좀 더 미적인 것에 있음도 알 수 있다. 꽃 속에서 들리는 뱃고동 소리나 “백발(白髮)의 노모가 혼자 저녁을 짓는" 풍경이나 “통음(通音)하던 하얀 눈송이들"은 현실성이 휘발된 미학적 공간이다. 이때 앞선 비판과 마찬가지로, 현실에서 멀어질수록 매력적으로 부풀어 오르는 그리움이 현실 세계를 미학적으로 단순화시키고 축소시키고 있다는 지적에 직면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인의 갈등과 분열, 소모적 피곤에 찌든 개인의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차원의 미적 공간 창출은 감각적 재현의 기능에 충실하면서 삶의 다른 영역을 상정하게 된다. 현실에서의 일탈과 새로운 안주에 대한 욕망은 시에서 현실의 맥락을 지우고, 미적 사물로서 변형된 자연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감각적 재현이 단순히 삶에 대한 낭만적 환상과 욕망의 결정체라고 매도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이런 태도는 현대사회에서 삶의 진실과 존재의 본질적 의의를 보장하기 위해, 인간과 자연의 동일성의 상태를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읽어야 한다.
  
자연의 풍경 통해 미학적 감응력을 최대로 끌어올려
           
“눈이 내리고 눈이 쌓여/오도가도 못"하던 북항의 마을에도 봄이 오고 꽃이 피고, 내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부재하는 시원의 공간을 현현시키려는 시인의 모습이다. 현실에서 상실된 요람을 회복하고자 하는 일종의 기능태이기도 하다. 시인은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동일성의 상태를 원한다. 일상의 현실 논리 속에 편입되지 않은, 심층의 공간을 확보하고 삭막한 현실의 지향점을 제시해 준다.
   
무엇보다 이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통음(通音)’의 지점이다. 세상과 절연된 겨울 북항으로 표상되는 심층에 내재된 삶의 진실이, 세상 밖으로 드러나고 소통함으로써 결국 봄이 오는 것이다. 화자는 봄이 오듯이 당신이 되돌아올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떠나는 곳이 있고 돌아오는 것이 있지만/이 세상에 항구는 단 하나다"라는 화자의 진술은 결국 당신이 떠난 곳도 돌아올 곳도 이곳뿐임을 달리 표현하고 있다. 이 대목은 자연의 풍경을 통해 미학적 감응력의 최대치를 끌어올리며 시적 긴장이 발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권대웅은 자연에 대한 심각한 질적 변용을 꾀하지는 않지만 그가 지향하는 황홀경의 세계는 훨씬 더 미학적 의미를 확보하면서 우리에게 진한 감동을 안겨주고 있다.
 
 
누가 자꾸 나무를 심어요
방 안 가득 넘실대는 초록, 벌써 내 키만큼 자랐죠
누가 자꾸 문을 두드려요
두 개 세 개의 두툼한 자물쇠로 여며 둔 것인데
벽을 허물고 천장을 부숴요 누가 자꾸
갓 구운 해를 잘라 아침 접시 위에 놓아요
그 먹음직스러운 빛, 아아
포크를 든 나는 거의 신음할 뻔했죠
이게 무슨 일인지 몰라
불을 끄고 또 꺼요
늙은 벽시계는 갓난쟁이가 되어 별안간
웃네요 뻐꾹뻐꾹
어둠의 말간 젖을 빨며 노네요
이게 무슨 일인지
누가 자꾸
허기를 훔쳐 가요 울음을 가져가요
넘실대는 초록, 그 사이사이 여문
빨강
빨강을 하나 따다 반으로 쪼개어 볼까 재미 삼아
손을 뻗어 시늉하면
누가 자꾸
손을 가져가요 꼭 붙들고 놓아주지 않아요
- 박소란 「누가 자꾸」 전문
  
   
앞선 권대웅의 경우와 달리 박소란은 자연 풍경에 새로운 질적 변용을 꾀하고자 한다. 그의 시세계는 질적 통합과정을 통해 새로운 시적 특질을 잉태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시 세계를 개진한다. “두 개 세 개의 두툼한 자물쇠로 여며 둔" 문을 자꾸 두드리는 것의 정체는 무엇이며, “갓 구운 해를" 자르는 아침 초록의 잎사귀와 빨강의 열매 사이에서 시적 화자의 ‘허기’와 ‘울음’을 훔쳐가는 것은 무엇일까?
     
화자의 고백처럼 황량한 현실 속에서 메말라가는 화자를 위해 누군가가 자꾸 심는 나무는, 외부에 대한 고뇌와 대결 의식을 쉽게 내보이지 않는다. 그로부터 빚어지는 긴장감도 느끼기 어렵다. 다만 시인은 시적 화자의 내면과 나무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그 미학적 깊이를 ‘초록’으로 확보하고, 질적 변용을 통해 자기만의 개성적 시적 특질을 만들어내려고 한다. ‘나무’의 겉만 살피는 피상적 인식에서 벗어나 시인의 시선과 감각은 그 이면으로 파고든다.
    
시인은 자연 풍경에 새로운 질적 변용을 꾀해
    
“방 안 가득 넘실대는 초록" 속에서 해를 자르고, 빨강을 따는 것은 일상적 삶을 거부하고 내면의 욕망을 투사하는 행위다. “자꾸/손을 가져가"고 “꼭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것은 시인이 그 초록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치달리는 격렬한 고독과 같은 모습이다.
   
유폐된 삶으로부터의 도피는 현실에 처절하게 부딪치면서 영혼의 고향을 지향하는 어떤 질주이다. 자신의 영혼이 치유될 수 있는 초록은 시인이 지닌 욕망의 표상이다. 초록과 빨강은 화자가 안주하고 있는 공간의 “벽을 허물고 천장을 부"수고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누가’ 없던, 초록 이전의 황량한 세계에서 벗어나 화자를 구원해주는 대상은, 화자에게 초록의 황홀경을 선사하면서 강렬한 지향성을 내보인다. 이때 가공할 욕망도 없는 화자는 유폐된 공간 속에서 스스로 응축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외부로 타전하고 초현실적 공간으로 망명을 시도한다.
       
초록으로의 회귀 내지 회복은 화자가 초록의 외부에 있는 누구와의 동일성을 희망하는 것이며 이러한 욕망은 타자인 ‘누가’와 동질의 것이 된다. 소통과 공존에 대한 갈망은 시인의 발랄한 상상력을 통해 초록의 풍경으로 새롭게 의미화된다. 박소란의 이러한 갈망은 이성이나 의식을 넘어서 비이성과 꿈의 영역으로, 그리고 경험적 감각의 경계를 넘어 인식의 지평을 심화시키기고 있다.
 
 

[입력 : 2018-11-27]   김병호 협성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more article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네이버 블로그
  • sns 공유
    • 메일보내기
Copyright ⓒ 서울스트리트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독자댓글
스팸방지 [필수입력] 왼쪽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포토뉴스

Future Society & Special Section

  • 미래희망전략
  • 핫뉴스브리핑
  • 생명이 미래다
  • 정책정보뉴스
  • 지역이 희망이다
  • 미래환경전략
  • 클릭 한 컷
  • 경제산업전략
  • 한반도정세
뉴시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