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9월 예멘의 정치 집회에서 50여명이 사람에 깔려 죽었다. 이런 인명 사고는 월드컵 응원이나 인기가수 콘서트처럼 인파가 몰리는 공간에서 발생하지 말란 법이 없다.
가령 호텔 연회장에 불이 나서 통로와 비상구로 군중이 몰릴 때 죽음의 공포에 직면한 사람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군중 속에 뒤섞여 비상구 쪽으로 함께 움직이거나 혼자 살 길을 찾으려고 발버둥치기 마련이다.
그러나 독일 교통공학자 더크 헬빙에 따르면 두 가지 행동을 함께 시도할 때 탈출 가능성이 높다. 2005년 '교통과학(Transportation Science)'에 발표한 논문에서 탈출 시도 시간의 60%는 군중과 함께 움직이고 40%는 스스로 살 길을 찾는 데 투입하면 탈출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자연재해나 대형사고 같은 공황적인 상황에서 인간의 두 가지 성향이 피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밝혀졌다. 첫째, 최악의 상황이 될 때까지 위험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둘째, 위험한 상황임을 알고도 살 길을 찾기보다 가족과 친구부터 챙기려 한다.
위험신호의 심각성을 간과해서 상황을 악화시킨 대표적 사례는 9·11 테러 공격을 당했을 때다. 세계무역센터 빌딩 안에 있던 사람의 83%가 비행기가 건물과 충돌하고 몇 분이 지나서야 상황이 심각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밝혀졌다. 2005년 '정신의학(Psychiatry)'에 실린 연구결과에 따르면, 건물이 불길에 휩싸였음에도 생존자의 55%만이 즉시 대피했으며 소지품을 챙기느라 멈칫거린 사람도 13%나 되었다.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혼자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인지상정일 터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침착하게 가족과 친구부터 돌보려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이런 군중의 행동은 사회적 애착(social attachment)이라 한다. 사회적 애착은 자신의 희생을 전제로 남을 돕는 것이므로 고귀한 행동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군중이 너무 많아 행동에 제약이 따를 때는 남을 돕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 2006년 1월 12일 해지(Hajj) 동안 발생한 대형 참사가 좋은 예이다. 해지는 이슬람교도가 해마다 성지인 메카를 참배하는 의식이다.
2007년 '물리학 개관(Physical Review) E' 4월호에 발표된 분석결과를 보면 군중이 지나치게 많을 때는 질서 있는 행동은 찾아볼 수 없었고 서로 밀치락달치락하면서 혼란에 빠졌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이 스스로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무것도 없었다. 2009년 12월 미국 과학저술가 렌 피셔가 펴낸 '완전한 무리 (The Perfect Swarm)'는 사람이 운집한 곳에는 가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주장한다. 출처=조선일보 '이인식의 멋진 과학' 2010년 6월 19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