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가 해군으로 참전하였습니다."
지난 7월 주한미국대사로 부임한 해리 해리스 대사의 일화다. 그는 지난 12월 11일 한미우호협회가 주최한 ‘송년 한미우호의 밤’에 참석해 축사를 했다. 축사에 앞서 부임 후 경험한 사례를 들었다. 한국의 젊은이가 자신에게 6·25전쟁에 참여했느냐는 것이었다. 이 젊은이는 미 해군 태평양사령관을 지낸 해리스 대사가 6·25와 관련돼 있다는 식의 보도는 접했던 모양이다. 부친이 6·25에 참전한 것을 두고 한국의 젊은이는 해리스 대사에게 참전했느냐고 질문했다. 65년 전에 휴전된 6·25전쟁 아닌가. 해리스 대사는 이런 취지로 말했다.
“내가 너무 늙어서 그렇게 보인 모양이라고 생각했습니다.(중략) 전쟁의 기억이 세대가 변하면서 멀어지고 있는데 이를 내버려두어선 안 됩니다. 올해가 한미동맹 65주년입니다. 이 동맹이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고 이 지역의 안정에 주춧돌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는 "굳건한 한미 동맹, 그리고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해 노력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했지만 "한미동맹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사진=주한미국대사관 |
해리스 대사는 축사 말미에 “한미동맹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된다"며 뼈 있는 말로 발언을 끝냈다.
북한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갖고 있는 해리스 대사는 북한을 향해서가 아니라 한국을 향해 '격식 있는 말'로 경고하고 있다.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는 해리스 대사의 말과 관련해 “이 말은 한국 측에 대한 경고인데 한국이 아무리 미국을 상대로 억지를 부려도 미국이 과거처럼 참아줄 것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는 뜻"이라고 했다.
지금의 한국이 ‘한미동맹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현재 대한민국 정부는 ‘탈(脫)한미동맹’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탈미(脫美)·적일(敵日)하고, 친북(親北)·연중(連中)을 우려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의 보고서만 봐도 그렇다. 통일연구원은 12일 정전협정을 차후 대체할 수 있는 ‘한반도 평화협정’ 초안을 공개했는데 “북한의 비핵화가 50% 이뤄지면 평화협정을 체결할 수 있다"며 주한미군 감축을 시사했다. 통일연구원이 공개한 ‘한반도 평화협정 구상’은 전문(全文)과 9조 34항으로 돼 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북한에 지나치게 유리한 안(案)"이라며 지적이 제기됐다.
해리스 대사가 “한미동맹이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다"는 말은 한국의 정치·경제적 발전은 한미동맹 기초 위에 가능했다는 의미다.
현 정부는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해왔다. 그러나 ‘행동’ 측면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렇다보니 미국 보수논객들은 “북한이 원하는대로 한국이 변하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는 것 아닌가. 강인선 조선일보 특파원은 13일자 기사를 통해 이렇게 보도했다.
“‘북한이 한국이 원하는 대로 변하지 않고 한국이 북한이 원하는 대로 변하고 있다.’ 지난 11일 워싱턴의 대표적 보수 성향 싱크탱크인 '기업연구소(AEI)'에서 개최한 토론회에서 대북 제재 전문가인 조슈아 스탠턴 변호사가 한 발언이다. 이날 토론회 제목은 '한국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우파 권위주의에서 좌파?'였다. 좌파 다음에 물음표를 놓긴 했지만 한국에 권위주의 성향이 등장한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한 이 제목은 워싱턴에서 화제가 됐다. AEI는 ‘북핵 위기와 한·미 군사 동맹이 한반도에 대한 국제적 보도를 지배해왔다’면서 ‘그런데 한국은 어떤가?’란 질문을 던졌다. ‘문재인 정부가 언론을 탄압하고 언론 자유를 제한하고 사법부와 공무원 조직에서 당파성을 조장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다고도 했다."
미국의 ‘대한(對韓)견제’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 있었다. 미국 측이 “남북관계 개선에 속도를 조절하라"는 내용이 대표적이다.
이런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G20 정상회의 참석차 아르헨티나 방문에 앞서 중간 기착지로 ‘미국 LA’가 아닌 ‘체코’를 들른 것과 관련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시간과 거리를 따져볼 때 남미(南美)를 가려면 통상적으로 미국을 경유지로 해왔는데 문재인 대통령의 전용기는 기존과 달리 정반대로 체코를 들러 아르헨티나에 ‘안착’했다.
일각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의 전용기가 지난 9월 평양정상회담차 북한지역을 들러 대북(對北)제재에 걸렸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미국의 독자적 대북제재방안인 ‘행정명령 13810호’에 따르면, 북한에 다녀온 모든 비행기는 180일 이내에 미국 땅에 들어올 수 없다. 다만 미국 행정부의 특별허가를 받으면 제재를 면제하는 예외 규정이 있다.
9월 평양정상회담 직후 문 대통령이 전용기를 타고 유엔총회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미국의 ‘특별허가’가 있었기에 가능했고 이번 G20 때는 미국 측이 허락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주요 골자다. 문 대통령이 체코를 방문했을 때 체코 대통령은 해외 순방 중이어서 의혹은 더욱 증폭됐었다. “방문국 대통령이 부재(不在) 중인데 왜 문 대통령이 갔느냐"며 것이었다.
청와대 "미국 허가 받고 뉴욕 갔다는 것은 사실 무근"
‘김정은 서울답방’ 문제를 두고서도 한미간 이견은 없었는지 모를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G20 정상회의 때 만나 ‘김정은 서울답방’이 한반도 평화와 미북간 대화에 긍정적이라 데 뜻을 같이했지만, 미국은 최룡해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등 북한 고위 관리 3명을 제재대상으로 추가·지정했다.
김정은의 ‘연내(年內)’ 서울답방은 사실상 물 건너갔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12일 “김정은 위원장의 연내 서울 답방은 이제 어렵게 됐다"고 밝혔다. 청와대는 제2차 미북(美北)정상회담 이전인 내년 1월 중으로 ‘서울답방’을 재추진할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 대한민국은 과연 안전한가. 한미동맹의 끈은 점점 얇아져 가고 있고, 남남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져 가는 건 아닌가. 이것이야 말로 북한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代)가 그토록 원했던 '남조선'의 모습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