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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미래관계

상수동에서의 하루

“어느 날 아침 중년의 한 사내는 초록 앞에서…”

글  김재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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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순간 입술과 혀의 긴장 사이로 초록과 진초록을 입은 계절은 눈부시다. 지나가던 초로의 여성이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는다. 젊은 남녀는 함께 고개를 돌려 초록에게 경의를 표한다. 저 초록을 이룩한 나무와 풀과 꽃을 위하여 상수동은 귀한 땅을 내주었다. 그리하여 계절이 오고가는 어느 날 아침 중년의 한 사내는 초록 앞에서 뜨거운 커피를 마신다.

   

상수동에서는 한강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빌딩과 아파트에 가로막혀도 강은 강변 마을을 잊지 않는다. 강의 기억이 강변 마을을 윤기 있게 하고 그곳 사람들을 풍성하게 한다. 25년 전 그도 나를 위해 그런 풍성한 저녁을 마련했다. 우리는 그날 눈앞의 현실에 분노했고, 알 수 없는 미래를 불안해하면서 저녁을 먹었다. 그와 나 사이로 그날의 초록과 한강은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는 동양철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었다. 문학이론을 전공하던 나는 그의 유식한 ‘동철’(東哲)적 언사와 진국의 성품을 좋아했다. 그는 비판적 지식인이었지만 비판적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정치-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지만 일상에서는 함부로 누구를 비판하지 않았다. 그는 군부독재 수괴를 구속하지 않는 데 분노했지만 친우들의 흉허물에 분노한 적은 없었다. 그는 날카로웠지만 후덕한 사람이었다.

    

그날 상수동에서 그는 돼지껍데기를 샀다. 불판에서 이글거리며 튀어 오르는 껍데기를 나눠 먹으면서 의당 소주도 홀짝였다. 우리는 학문 외적인 일에 대해서도 잠깐 의견을 나눴지만 주로 학업과 미래에 대해 의논했다. ‘동철’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중국이나 대만에 유학을 가야 하는데…, 마르크스주의 문학이론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는 영국으로 가서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 1943- ) 교수를 직접 사사(師事)하면 좋은데… 하지만 그와 나는 하나같이 미비한 여건을 안타까워했다.

    

그는 그가 안타까워하는 집안의 내력을 이야기했고, 나는 내가 안타까워하는 집안의 내력을 이야기했다. 모두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어서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안타까움은 더해 갔다. 타는 돼지껍데기를 뒤집으며 그나 나나 어쩔 수 없이 소주를 더 마셨다. 그날은 여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고, 쏟아지는 빗소리만큼 연기는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았다.

    

내가 먼저 떠났다. 나는 학위논문을 쓰지 않은 채 지방 도시의 방송사로 취업해 내려갔다. 공부를 위해 취업을 포기하고 대학원에 갔으나, 공부 때문에 공부를 박차고 나와 취업을 하고 말았다. 그러면서 나는 “다시는 시를 거들떠보지도 않겠다."라거나 “다시는 문학 근처에도 가지 않겠다."는 등 모진 다짐까지 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 가까이 지나서야 논문을 썼다. 하지만 그는 학교에 남아 논문을 썼고 박사과정에 들어갔다고 했다.

    

한 지역방송사의 말단 사원이 되어 그런 ‘모진 다짐’을 실천하고 있던 나는 뜻밖에도 모 신문사 신인문학상의 시 부문 당선자가 되어 시단(詩壇) 말석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그가 내려왔다. 젊은 아내와 어린 아들 둘을 데리고 찾아왔다. 우리는 오랜만의 해후에 반색하며 주량을 넘겨 소주를 마셨다. 다음날 그는 내게 조용히 말했다. 중국으로 가기로 했다고. 가서 제대로 공부를 하겠다고. 우선 혼자 먼저 가고, 아내와 아이들은 준비되는 대로 합류할 것이라고. 그러면서 학비 가운데 부족한 금액을 좀 빌려 달라고. 곧 갚겠다고.

    

상수동 카페에 앉아 그를 생각한다. 그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원했던 공부를 잘 마쳤을까. 아내와 아이들도 곁에서 잘 지내고 있을까. 나는 그 무렵 그의 부탁을 들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회사 입사 이듬해 IMF 구제금융 사태가 발발했고, 전세 집 여주인은 사기단의 일원으로 수배령이 내려진 상태였고, 세상 물정 모르던 나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고율의 대출을 받아 집을 샀다. 그 충격파로 채무에 시달리는 삶은 20여 년 이상 이어졌다.

    

포털 사이트의 정보에 의하면 그는 북경의 한 대학에서 외국인 교수로 일하는 모양이다. “‘대중문화’라는 창을 통해 한국과 중국의 1920·30년대, 그리고 현재를 들여다보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는 다행히 공부를 잘 마쳤고, 연구자로서 소망대로 ‘동철’ 연구를 계속하고 있으며, 어엿한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살고 있는 모양이다. 천만 다행이다. 그가 이미 수년 전 간행한 『중국 대중문화, 그 부침의 역사』라는 책의 맥락과 같이 그도 나도 부침을 겪을 만큼 겪었다. 이제는 그가 원하는 공부를 마음껏 하며 살기를 기원한다.

    

가만 생각하면 그때 우리는 저 진초록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비록 눈앞의 현실에 고통을 느꼈지만, 넘치는 가능성의 지평 위에 서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그도 나도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적어도 몇 개는 되었다. 그가 원하는 중국에 간 것도, 내가 영국이 아니라 한 지역방송사에 들어간 것도 사실은 우리 선택의 결과가 아니겠는가. 그런 점에서 상수동 한 카페에서의 하루는 사라져 가는 가능성에 대한 탄식의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입력 : 2019-06-16]   김재홍 기자 more 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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